정치 리더십이 나라의 흥망을 결정한다. 국가의 운명은 결국 정치에 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된 패전국 독일에서 ‘라인강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49년 콘라트 아데나워가 서독 의회에서 1표 차이로 초대 총리에 선출됐기 때문이다. 기민당의 아데나워는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를 극적으로 제치고 14년간 집권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안착시켰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과감한 노동 개혁은 고질적인 ‘영국병(病)’을 치유해 성장 엔진을 되살렸다. 반면 포퓰리즘에 빠진 그리스와 베네수엘라 지도자들은 국가 재정을 거덜 내고 나라를 깊은 수렁에 빠뜨렸다.
대런 애스모글루 MIT 교수와 제임스 로빈슨 하버드대 교수는 공동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정치가 국가의 빈부를 좌우한다고 설파했다. 국경에 걸쳐 있는 노갈레스라는 도시의 미국 쪽 지역은 부유하고 멕시코 쪽 지역은 가난했다. 두 교수는 경제 제도를 결정하는 정치가 두 지역 간 생활 수준의 극명한 차이를 초래했다고 진단했다.
우선 요동치는 국제 정세를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중국의 갈등 격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으로 블록화와 신(新)냉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제4차 산업혁명의 파고와 코로나19 장기화로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까지 치열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급망 쇼크도 빚어져 세계 각국은 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 등으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가운데 주요 7개국(G7)과 중국·러시아 등에서도 최고지도자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어 ‘경제 위기는 정치의 위기’라는 분석도 나온다.
대한민국호(號)는 전(前) 정부의 부정적 유산과 글로벌 요인 등이 겹쳐 경제·안보 등에서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 위기)’을 맞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포퓰리즘과 반시장적 규제, 소득 주도 성장, 친노조 등 역주행 정책으로 ‘한국병’을 더 키우고 성장 동력을 약화시켰다. 2000년대 초반 5% 수준이었던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최근 2%로 추락했다. 이대로 가면 10년 내 ‘제로 성장’으로 접어든다. 우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올해 2분기 수출은 전 분기 대비 -3.1%로 곤두박질쳤고 상반기 무역 적자는 103억 달러에 이르렀다. 지난 5년간 선심 정책 남발로 확정 국가 채무에 연금 충당 채무까지 포함한 국가 부채는 763조 원이나 급증해 지난해 말 2196조 원에 달했다. 요즘에는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속에서 소비마저 줄어 스태그플레이션 공포가 현실화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위기의 강’을 건너고 5대 강국으로 진입하려면 4차 산업혁명의 주창자인 클라우스 슈바프가 역설한 ‘위대한 리셋(Great Reset)’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꺼져가는 성장 엔진을 되살리고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리셋이어야 한다. 첫째 과제는 과학기술 초격차를 확보하고 고급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이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는 기술 초격차로 무장해야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글로벌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반도체·배터리·원전·미래차·디스플레이·바이오 등 최소한 전략산업 5~10개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이 추격하기 어려운 첨단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불굴의 의지로 노동·규제·교육·연금 개혁 등을 추진해 투자 매력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세계경제포럼(WEF) 평가에서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가운데 35위에 그쳤다. 노사 협력은 141개국 중 130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노동시장 유연성과 노사 협력 수준을 높이는 개혁을 성공시켜야 성장률도 끌어올리고 질 좋은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 역대 정권은 규제를 ‘전봇대’ ‘손톱 밑 가시’ ‘붉은 깃발’ 등으로 비유하면서 개혁에 나섰지만 용두사미에 그쳤다. 윤석열 정부는 ‘모래주머니’로 지칭되는 규제들을 제거해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전장에서 부담 없이 뛸 수 있게 해야 한다.
잠재성장률을 제고하려면 이념·계층·지역·세대·젠더 갈등 조장을 멈추고 국론을 결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법치 등 헌법 가치를 지키는 사회를 만들고 약자도 함께 잘살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짜야 할 것이다. 첨단산업의 심각한 인력 부족을 해소하고 핵심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키워가려면 대학 정원 자율화를 포함하는 교육 대개혁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자주 국방력 강화와 한미 동맹 격상으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보 강국을 건설해야 지속 가능한 평화 체제를 만들 수 있다.
구조 개혁과 초격차 기술 확보 등의 국가 과제를 실천하려면 정치가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 민간 주도 시장경제, 안보 강화, 법치 등에 방점을 찍은 국정 운영 방향의 총론에서는 긍정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인사 논란, 말실수와 거친 언행, 정무적 대응 미숙 등 디테일과 스타일에서 국민 마음을 불편하게 해 직무 수행 지지율이 최근 28%(한국갤럽, 표본 오차 95% 신뢰 수준에서 ±3.1%포인트)까지 떨어졌다. 개혁 동력은커녕 국정 운영 동력마저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여야 정치권은 진흙탕 샅바 싸움을 하느라 21대 후반기 국회를 54일 만에야 정상화했다. 집권당인 국민의힘은 새 정부의 정책과 개혁을 전혀 뒷받침하지 못하고 당권 싸움과 ‘이미지 정치’ 등으로 허송세월했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 견제와 대안 제시라는 본래의 기능을 내팽개치고 국정 발목 잡기와 계파 싸움만 해왔다. 이러니 ‘정치가 실종됐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이다.
위기와 기회의 갈림길에서 경제·안보 강국을 만들려면 대통령과 여야 모두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소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여름휴가를 마친 뒤 심기일전해 위기 극복의 최전선에 나서야 한다. 낮은 자세로 국민들과 소통하고 모든 경제 주체의 고통 분담을 설득하면서 담대한 구조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여야는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모으면서 정책 경쟁을 펼쳐야 한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대표 직무대행 사퇴 등을 계기로 여야 모두 국민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새 지도부를 구성해야 할 것이다. 책임 정치가 가능하려면 깨어 있는 민심이 제대로 감시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시급히 정치를 복원해 한국 사회를 리셋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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