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핵심 이익이 무엇인지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가 계산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국제 관계에서 중요합니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 직함을 벗어던지고 1인 연구소를 설립한 정하늘(42·사진) 국제법질서연구소장은 3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사무실에서 가진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핵심 이익에 비춰볼 때’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미국 변호사 출신으로 법무법인 세종에서 활동하던 정 소장은 2018년 개방형 직위로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장으로 활동했다. 특히 2019년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진행된 한일 수산물 분쟁에서 드라마틱한 역전승을 일궈내 유명세를 탔다. 올해 세탁기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를 둘러싸고 벌인 미국과의 일전에서도 한국에 승리를 안겨주기도 했다.
정 소장은 잘나가던 공무원 생활을 스스로 걷어차고 나온 것은 급변하는 국제 질서를 몸으로 겪어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이후 미국이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최소한 그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없다고 평가한다. 그동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국제법 질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고 이에 따라 국가들의 대응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기존 국제 질서가 도전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국가 간 분쟁의 증가”라며 “연구 활동을 통해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소장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급변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가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가 내놓은 해법은 ‘핵심 이익’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 여기서 핵심 이익이란 북한과의 관계, 즉 안보 문제다. 한미 동맹 강화는 이러한 안보 문제를 뒷받침하는 요인이다. 한국이 미국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는 것도 우리의 핵심 이익에 영향을 미치는 한미 동맹 강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중국의 보복을 우려하지만 정 소장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심화하면서 중국도 한국이 미국 쪽으로 기울 것이라는 것을 예상 못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IPEF 참여를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내다봤다.
전략적 유연성은 상대방이 우리의 핵심 이익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가능하다는 게 정 소장의 설명이다. 요구의 상한선이 어디고 타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상대방이 알아야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밖으로 전하는 레드라인에 대한 메시지가 흐려지면 전략적 유연성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전략적 유연성은 레드라인에 근거해 상대방도 계산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그는 최근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사회주의 체제는 이미 실패했고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과 같은 절대 강국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당분간 별로 없어 보인다. “국제 질서에서 미국의 그림자가 약해지기는 하겠지만 여전히 가장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남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유다.
WTO 체제도 위상은 많이 약해지겠지만 그 실효성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실제로 WTO는 지난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2차 각료회의에서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코로나 백신 지식재산권, 식량 위기 대응, 수산 보조금 등에서 기념비적인 성과를 이뤘다는 평가다. 정 소장은 “WTO만이 해결할 수 있는 분야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이번 각료회의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WTO가 붕괴할 경우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