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권 초기부터 국가 최고 지도자가 강한 의지를 갖고 노동 개혁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 미국과 영국이 그랬고 2000년대 초반 독일이 그랬다. 1990년대 말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서 일찍 벗어날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도 정권 출범과 함께 노동 개혁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떤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0일이 다 돼 가지만 노동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노동 생산성 추락으로 산업 경쟁력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작용이 뻔한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밀어붙이는가 하면 노동계의 사업장 불법 점거는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산업계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달 하청 업체 노동자들의 불법 점거 농성으로 8000억 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다. 현대제철도 특별격려금을 달라며 노조원들이 사장실을 100일이 넘도록 점거하면서 경영 활동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 5년 내내 이어져 온 강성 노조의 불법 행위가 정권 교체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걸 바로잡지 않고는 경제가 살아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더 걱정인 것은 노동 개혁의 큰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이 5월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동 개혁을 주요 국정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플랜이 보이지 않는다. 노동정책의 주무 부서인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 근로제와 임금체계 개편 등 세부 과제에 매몰돼 있다. 물론 이런 과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노동 개혁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개혁의 방향에 대한 큰 그림이 먼저 나와야 한다. 이것이 없이 개별적인 문제 해결에 매달리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일단 ‘미래노동시장 연구회’를 통해 개혁의 방향을 잡는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연구회 자체도 근로시간과 임금체계 등 시급한 과제를 중심으로 논의한다는 방침이어서 산업계가 기대하는 그런 큰 그림을 그려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설령 연구회가 어떤 결과물을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최근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점은 추진 동력 면에서 걱정스러운 요인이다. 연구회 위원들의 구성도 문제다. 연구회는 대학 교수 등 학계 일변도로 구성돼 있다. 산업계 인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구성으로는 산업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이는 2002년 독일의 노동 개혁을 성공시킨 하르츠위원회와는 딴판이다. 당시 독일 정부는 폭스바겐에서 이사로 근무했던 페터 하르츠에게 위원장을 맡겼고 위원에는 재계 인사들을 대거 포함시켰다. 독일이 노동 유연성 향상과 복지 축소 등을 통해 경제를 다시 살려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은 경제 비상 상황이다. 인플레이션에 따른 경기 침체로 인해 각국에서 수요 위축 조짐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의 주력 수출 품목인 자동차와 반도체·전자제품마저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무역수지는 4개월 연속 적자 행진이다.
이 같은 경제위기에서 탈출하려면 산업 현장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정부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처럼 부분적인 이슈에만 매달려서는 근본적인 노동 개혁이 어렵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노동계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버린 노사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고는 노동 생산성을 올리는 것도, 경제를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노동계 내부적으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이중 구조를 해소하는 것도 서둘러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기를 맞아 날로 확산되는 플랫폼 산업 환경에 맞게 노동 체계를 정비하는 것도 시급하다.
이런 복잡한 실타래를 풀려면 하루빨리 로드맵을 세워 스피드 있게 실천해 나가야 한다. 지금처럼 자잘한 과제에 매달려 시간만 보내면 노동 개혁은 물 건너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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