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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리포트]'13代째 가족기업' 머크…비결은 공익재단 통한 가업승계

[유럽서 배우는 장수기업 육성 제도는]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

☞업력 100년 이상 기업 7만곳

490년 단추·바늘 전문 생산하는 '프림'

6대째 가족경영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260년간 필기도구 만든 '파버카스텔' 등

차별화된 기술력 가진 '중소·중견' 많아

☞재단설립으로 영속성·공익기여 두토끼

공익 추구하면서 경영참여 이중재단 형태

기업활동 수익 → 사회환원 → 안정적 승계

창업가치 대물림·국가 경쟁력에 큰 역할

'효과적 후계 도구' 한국도 적극 도입해야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


기업이 고객과 지역사회의 사랑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생존해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은 창업 당대에 사라지고 소수만 살아남아 장수 기업의 여정에 들어선다. 기업의 장기 생존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업력 100년 이상인 기업이 전 세계에 7만 개를 넘고 200년 이상 장수를 누리는 기업은 7000여 개에 달하며, 1000년 넘게 생존해온 초장수 기업도 20여 개에 이른다.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수백 년을 이어온 기업 가운데는 고유 사업 분야에서 차별화된 기술력을 가진 중소·중견기업이 많다. 49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단추와 바늘 전문 생산 업체 프림, 창업주의 13대 후손이 경영하는 제약 및 화학 분야의 명문 장수 기업 머크, 260년 동안 9대에 걸쳐 연필 등 필기도구를 생산해온 파버카스텔, 185년 동안 6대째 가족 경영을 이어온 최고급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머크의 경우 가족주주들이 재단을 설립해 소유권을 행사한다.

특히 광학 분야에서 전 세계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칼자이스는 1846년 설립된 후 현재까지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독립적인 재단 운영 체제를 이어왔다. 칼 자이스의 뜻에 따라 설립된 공익 재단인 칼자이스재단은 회사 주식의 100%를 소유하고 주주의 권리도 행사한다.

대부분의 장수 기업들은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져 높은 세계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혁신을 지속하고 근성 있는 기업 문화를 유지한다. 후계자를 철저하게 교육시키고 대를 이어 지켜온 가족 가치가 확립돼 있으며, 창업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들 기업은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고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면서 국가 경쟁력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한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장수 기업을 비롯해 다수의 성공한 기업 소유주들이 자신이 일궈온 기업의 주식 및 지분 등을 출연해 재단을 설립한 사례가 많다. 이들이 재단을 설립하는 이유는 주로 기업의 보존 및 영속성 유지와 사회 공헌 활동 수행과 관련이 있다. 창업자의 이상 실현, 자녀 등 가족 구성원에 대한 경제적 보상 등도 재단을 설립하는 이유다.

명문 장수 기업이 많은 독일에서 기업의 승계는 일찍부터 중요한 관심사였다. 독일은 가족 기업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재단을 활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재단의 역사가 오래된 독일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재단이 활동하고 있지만 오늘날 기업 승계와 관련해 주로 활용되는 기업 재단의 형태는 이중재단(doppelstiftung)이다. 이는 ‘법률적으로 독립된 2개 혹은 그 이상의 재단이 기업의 주식 및 지분을 보유하면서 경영에 참여하는 형태’다. 이중재단 형태의 기업재단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모델은 공익재단을 운영하면서 부수적으로 사익 목적 재단에 해당하는 가족재단이 함께 활동하는 방식이다. 공익재단은 공익 목적 사업을 수행하고 세제상의 혜택과 국가의 엄격한 감독을 받는다. 가족재단은 하나 이상의 특정 가족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며 세제 혜택이 없고 국가의 감독도 거의 받지 않는다. 이중재단의 경우에는 통상적으로 보유 주식 및 지분에 대한 의결권과 배당수익권을 분리해 운용한다. 공익재단은 기업에 대한 배당수익권의 대부분을 보유하면서 의결권은 가지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행사한다. 반면 가족재단은 형식적으로나마 배당수익권의 일부를 보유하되 기업 의결권의 대부분을 행사해 기업을 통제하고 기업 경영권을 확보한다. 이 모델은 기업의 안정적 경영과 승계를 가능하게 하고 기업의 수익을 공익 목적에 지속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제공해 기업의 영속성 유지와 사회적 책임 활동 수행에 기여한다.



독일의 기업재단 사례로 보쉬사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1886년에 설립돼 136년 동안 가족기업 형태를 유지해온 자동차 부품 생산 전문 기업이다. 창업자 로베르트 보쉬는 1964년 유언을 통해 자신이 보유한 기업 지분을 출연해 공익 목적의 재단을 설립했다. 기업 지분의 92%를 소유한 이 재단은 배당권 행사로 얻은 수익을 정관에서 정한 목적사업을 위해 사용한다. 재단은 보유 지분에 대한 의결권의 전부를 보쉬산업신탁합자회사에 위탁하고 있다. 창업자의 후손 20여 명은 회사 지분의 7.99%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배당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해 경제적 이익을 얻는다. 보유 지분 7.99%에 대한 의결권 중 7% 지분에 해당하는 의결권은 가족주주들이 직접 행사하고 나머지 0.99%는 보쉬신탁에 위탁한다. 이로써 보쉬신탁은 0.01%의 지분을 보유했으면서도 93%에 달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며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 보쉬 가문의 대표자는 보쉬신탁 이사회 멤버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가족주주와 가문의 입장을 대변한다. 재단 중심의 지배구조를 통해 승계 관련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해소한 보쉬그룹은 독립적인 전문경영으로 기업 운영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경쟁력을 제고해나가고 있다.

종합미디어그룹인 베텔스만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1835년 설립 이래 187년 동안 가족기업으로 존속해온 장수 기업이다. 창업자의 후손으로 4대 최고경영자(CEO)였던 라인하르트 몬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 기업의 영속성 유지, 기업에 대한 지배력 확보, 상속세 부담 경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1977년 공익재단을 설립하고 보유하고 있던 기업 주식 68.8%를 재단에 출연했다. 3개 기업 관련 재단이 이 회사 주식의 80.9%를 보유하고 나머지 19.1%는 창업자 후손인 몬 패밀리가 소유한다. 3개 재단과 몬 패밀리는 각각 보유한 주식에 대한 배당권을 정상적으로 행사하지만 의결권은 기업운용법인(BVG)에 위탁한다. BVG는 기업의 주식을 보유하지 않지만 위탁받은 의결권(100%)을 행사하면서 기업을 통제한다. 그룹을 사실상 지배하는 BVG 이사회는 창업자 후손인 몬 패밀리 3인과 독립적인 인사 3인으로 구성돼 있고 모기업인 베텔스만과 다수의 자회사로 구성된 베텔스만그룹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에서 기업을 승계하는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로 이중재단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배경은 무엇일까. 재단을 기업에 대한 부당한 지배력 확보나 사익 편취 방안으로 보는 시각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재단을 통해 공익에 기여하면서 세제상 혜택을 받는 동시에 기업의 안정적 승계와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기업은 물론 근로자와 지역사회 및 국가 경제에도 유익하다는 사회 전반의 인식과 함께 관련 법 제도가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장수 기업으로 가는 길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과제는 승계 문제다. 최근 발표한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에는 중소·중견기업의 안정적 승계를 지원할 목적으로 가업상속공제 적용 대상 기업의 범위와 상속공제 한도를 확대하고 사후관리 의무를 완화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승계를 준비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기업의 안정적 승계는 조세 부담 완화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승계 과정에서 위협을 받기 쉬운 경영권의 안정적 확보와 효과적인 지배구조 구축을 뒷받침할 법제도적 기반도 함께 정비해나가야 한다. 그 효과적인 방안 중 하나로 독일 기업재단의 한 유형인 이중재단 제도 도입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행 재단에 대한 주식 출연 한도와 관련 세제, 재단 보유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 재단의 오남용 방지를 위한 국가의 지도·감독 등에 대한 개선 및 선진화가 수반돼야 한다. 이중재단 제도 도입은 기업 활동으로 창출한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고 승계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을 완화하며, 기업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더 나아가 좋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 확대, 나눔 및 기부 문화 확산으로 이어져 경제 및 사회의 활력 제고와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조병선 원장은…독일 쾰른대에서 경제공법을 전공하고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IBK경제연구소장과 숭실대 벤처중소기업학과 교수, 한국가족기업연구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가족기업의 성공 승계 전략’ ‘적자사장 흑자사장’ ‘가족기업의 경영과 승계 전략’ 등이 있다.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금융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철탑산업훈장과 대통령표창을 각각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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