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내면아이의 상처를 치유하고 싶다는 독자들의 편지를 많이 받습니다. “우리는 왜 내면아이와 대화해야 할까요? 그 두려움을 넘어설 용기를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을까요?” 내면아이와 만난다는 것은 최고의 멘토이자 베프를 늘 가슴 속에 지니고 다니는 기쁨입니다. 어리다는 이유로,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이유로, 우리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어른들이 많았지요. 이제는 내가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좋은 어른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내면아와의 대화, 그것은 밝고 좋은 이야기라서 즐거운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내가 숨기고 억압해왔던 부분이 마침내 보이기 시작했기에 느끼는 발견의 기쁨이지요.
내면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은 잃어버린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입니다. 희미해진 부분을 선명하게 만들어서 ‘내가 되찾아야 할 나’를 보다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면아이의 상처가 선명하게 깨어나는 순간, 그때 돌보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부분도 함께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림자와 만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림자의 층을 뚫고 들어가면 반드시 내 안의 가장 환한 빛과도 만날 수 있습니다. 상처 때문에 나의 잠재력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이것밖에 못하니’ ‘저 아이는 저렇게 잘하는데’라는 어른들의 비난을 들으면서 급격하게 소심한 성격으로 바뀌었던 순간들이 기억났습니다. 저도 표현하고 싶은 마음, 재능, 꿈이 많았는데 그것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어요. 다행히도 글쓰기라는 탈출구가 있었기에 제 안의 잠재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표현의 탈출구가 필요합니다. 그 표현의 탈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내면아이와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당신의 내면아이는 당신의 성인자아가 말을 걸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의 내면아이는 저의 성인자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때 너는 왜 당당하게 너의 길을 가지 않았니? 넌 충분히 꿈을 펼칠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 동생들과 시골 할머니집 대청마루에 누워서 별 보던 거 기억나니? 그때 넌 참 괜찮은 어린이였는데.” 그런 내면아이의 해맑은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자, 좀 더 여유롭고 지혜로운 또 하나의 나와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내면아이의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당신은 이미 반 이상은 낫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면아이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내면아이의 한 맺힌 심정을 들어주고, 현실 세계에서 그 내면아이의 슬픔을 풀어주는 행위를 어떻게든 해주면 분명 내 안의 불안과 공포가 녹아내리기 시작해요. 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지 않나요. 우리는 내면아이를 달래어 세상 밖으로 용감하게 나오도록 이끌 수 있는 건강한 성인자아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면아이와 만나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더 나은 어른이 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복잡하다 싶으면 이것만 기억해두세요. 내면아이와 친구가 되는 것은 최고의 베프를 내 안에 간직하는 일이라는 것.
내면아이의 빛은 우리 안에 아직 표현되지 않은 싱그러운 잠재력이에요. 저는 때로는 당신의 내면아이가 되어 당신의 성인자아에게 속삭이고 싶어요. 예컨대 이렇게 당신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넌 음악을 사랑하잖아. 넌 역사를 좋아하잖아. 넌 글을 무척 잘 쓴단다. 난 네가 글을 썼으면 좋겠어. 이렇게 당신의 내면아이로 ‘빙의’되어 당신을 추앙하고, 응원하고, 마음껏 잠재력을 펼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성인자아와 내면아이가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 수 있을 정도로 친밀감을 느끼고 마침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 바로 핵심적인 치유와 극복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운명 앞에서 용감해지기 위해서, 내 꿈 앞에서 순수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내면아이의 찬란한 빛을 되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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