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한 내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재벌이고, 눈 높은 시월드와 마주하고 혼란스러워지는 여자 이야기. 당연히 동양권에서 제작한 영화 줄거리인 줄 알았더니 할리우드 작품이란다. 한국에서 너무 뻔하디 뻔한 이 이야기는 북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하며 반향을 일으켰다. 넷플릭스까지 상륙하며 다시 주목받고 있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감독 존 추)이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자라온 레이첼(콘스탄스 우)은 뉴욕대 최연소 경제학 교수로 이름 날릴 만큼 능력자다. 1년째 알콩달콩 사랑을 이어오고 있는 남자친구 닉(헨리 골딩)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닉이 고향 싱가포르에 있는 친구 결혼식 들러리로 함께 참석하자고 제안한다. 레이첼은 생애 처음으로 아시아를 방문한다는 설렘과 닉의 가족도 만난다는 기대를 안고 비행기에 오른다. 이때부터 레이첼은 닉이 싱가포르에서 누구나 아는 재벌이라는 것을 알고, 단번에 사교계의 질투의 대상이 된다. 며느릿감에 대한 기준이 높은 닉의 어머니 엘레노어(양자경)가 평범한 미국 이민자 가정의 딸 레이첼을 탐탁지 않아 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너무나도 익숙한 로맨스 드라마 전개다. 신분의 차이, 출생의 비밀, 심지어 시월드 입성이라니. 이른바 신데렐라 스토리의 총집합이다. 선악 구분도 뚜렷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헤쳐나가는 캔디 같은 여자 주인공 곁에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친구 펜 린(아콰피나)도 있고, 골탕 먹이려고 시기를 엿보고 있는 사교계 명사들도 있다.
할리우드에서 보니 신선하다. 대규모 예산, 블록버스터 위주의 할리우드 작품들 속에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다른 결을 가졌다. 가볍고 흥미 위주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이런 전개가 익숙해서 클리셰 범벅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성공의 공식이 통한 것이다.
볼거리가 많은 것도 큰 재미 요소다. 아시아계 미국인인 존 추 감독이 할리우드에 보여주고 싶은 아시아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제목처럼 닉이 엄청난 부자라는 설정 덕분에 대저택, 화려한 파티, 초호화 결혼식 등이 이어진다. 싱가포르 홍보 영상이라는 말일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싱가포르의 낮과 밤, 미슐랭 평가까지 받는 길거리 음식 등 다양한 모습도 보여준다. 여기에 간간이 언급되는 K팝 아이돌, 한국 코스메틱 이야기까지. 때로는 가볍게 비추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아시아의 화려한 면을 부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인다.
결국 뻔함이 통할 수 있었던 것은 공감 요소가 있어서다. 존 추 감독은 “인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이야기의 힘”이라고 일컬었다. 레이첼이 가족의 흠까지 들추며 반대하는 엘레노어에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자 감정을 거두고 엘레노어를 마작실로 부르는 장면에 모든 메시지가 함축돼 있다. 엘레노어는 마작을 하며 레이첼에게 “넌 우리 동족이 아니야”라고 선을 긋고, 레이첼은 닉이 청혼한 사실을 알리며 “걱정 말라. 거절했다”고 한다. 레이첼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엘레노어는 레이첼이 버린 패로 마작 게임까지 승리하고 미소를 띤다. 하지만 알고 보니 레이첼은 자신이 이길 수도 있었지만 엘레노어에게 패를 준 것. 그러면서 어떤 선택을 하든 패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국적과 인종, 나이, 성별을 떠나 어떤 입장에서도 뇌리에 박힐 장면이다.
이런 보편성 덕분이었을까. 넷플릭스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를 오리지널로 염두에 뒀다. 높은 예산을 제안하며 배급을 제안했다고. 그러나 존 추 감독은 아시아계 배우로만 캐스팅된 작품이 할리우드의 정형화된 시스템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거절했다. 그 결과, 작품은 북미 박스오피스 3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제작비 3,000만 달러의 7배가 넘는 수익을 거뒀다. 아울러 지난 10년간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거둔 영화가 되며(2018년 개봉 기준), 동양인으로 이뤄진 할리우드 영화의 유의미한 족적을 남겼다.
◆ 시식평 - 알면서도 보는 데는 이유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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