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거듭 강조했다. 5월 국회 시정연설 때와 달리 이번에는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 파업의 원인이 됐던 노동시장 양극화와 이중구조에 대해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보였다.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정규직과 파견, 원청과 하청 근로자 간 처우가 너무 차이 나고 양극화돼 있기 때문에 공정한 임금도 노사 안정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밝힌 셈이다. 대통령이 노동시장 실태에 대한 인식과 개혁 방향에 대해 준비된 발표문이 아니라 기자 문답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밝힌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대통령의 이런 인식에 비춰보면 고용노동부가 미래노동시장연구회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노동 개혁의 콘텐츠는 너무 협소해 보인다. 고용부의 구상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이라는 큰 그림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맡기고 주 52시간 근로제와 임금체계 개편만 따로 뽑아 우선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사정이 있겠지만 10월께 연구회가 내놓을 개혁안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다만 윤 대통령이 경사노위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계획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회 개혁안을 경사노위 대화 테이블에 올릴지, 아니면 정부가 입법 절차를 포함해 바로 실행에 들어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노동 개혁 관행으로 보면 윤석열 정부도 사회적 대화를 생략하고 국회로 바로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사노위를 가동시키지 않고 고용부가 연구회를 통해 노사 의견 수렴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아예 경사노위를 건너뛴다면 한국노총과 야당은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 이유부터 따지고 들 것이다. 내용 면에서도 우선 추진 과제로 두 개만 골라낸 근거를 설명해야 한다. 불필요한 시비를 줄이려면 고용부와 연구회가 주 52시간제와 임금체계만이 아니라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혁이라는 큰 그림을 갖고 중장기 개혁안을 패키지 형태로 짜는 게 낫다. 그리고 이를 초안으로 삼아 경사노위에서 대화와 타협의 프로세스를 밟는 게 더 빠른 길이다.
이런 길을 선택한다면 2015년의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9·15 대타협)’ 사례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무엇보다 9·15 대타협 한국의 사회적 대화 역사에서 유일하게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재평가돼야 한다. 내용 면에서도 단기 현안 과제와 중장기 개혁 과제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타협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지금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통상임금의 법적 정의뿐 아니라 정년 연장과 임금체계 개편 등 당시 가장 큰 현안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비롯해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여러 방안들이 포함돼 있다. 다만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근로계약(통상 해고)에 관한 제도 개선 방안의 경우 향후 논의 절차에 대해서만 합의했다.
9·15 대타협은 개혁의 과정 관리(process management)라는 관점으로 보더라도 많은 참고가 된다. 정면교사 한 가지는 대통령이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을 개혁의 사령탑으로 세우고 타협의 전권을 부여함으로서 협상을 주도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불행이지만 반면교사도 있다. 대통령이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합의서 서명이 끝난 후 정부 여당이 곧바로 미진한 사항(통상 해고 등)에 대해 행정 지침이나 법 개정으로 보완하겠다고 욕심을 부릴 때 대통령이 이를 막았어야 했다. 벼랑 끝에 몰렸던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결국 합의 파기를 선언했고 그 이후 통상 해고 등에 관한 논의는 아예 봉쇄됐다.
윤석열 정부의 노동 개혁 로드맵은 아직 미완성으로 보인다. 마침 대통령 비서실에 정책기획수석이 새로 들어와 국정과제를 조율한다는 것은 긍정적 변화다. 부디 그동안 부처에만 맡겨놓았던 교육과 노동·연금 등 중장기 국가 개혁 과제들을 대통령이 직접 챙기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노동 개혁에는 정치적 위험이 따르지만 성공하면 경제 회생뿐 아니라 그만큼 정치적 성과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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