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들어 포격이 끊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가 외부 전력망과 완전히 분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원전 주변에 대한 크고 작은 공격으로 ‘제2의 체르노빌’ 우려가 고조되던 자포리자 원전에서 원자로 냉각에 필수적인 전력 공급마저 끊기는 위기 상황이 나타나면서 전 세계적인 핵 참사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25일(현지 시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원전 인근에서 발생한 화재로 마지막 송전선이 훼손돼 원전이 일시 가동을 멈추고 자포리자 지역의 전력 공급이 끊겼다고 밝혔다. 비상사태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가 즉각 가동돼 원자로 냉각용 전력을 대신 공급하고 추후 원자로 2기 중 1기의 전력 연결이 복구되면서 일단락됐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사태가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방사능 재난 한 발짝 앞으로 몰아붙였다”면서 러시아를 강력히 비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며 "만약 디젤 발전기가 가동하지 않았거나 발전소 직원들이 전력 차단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미 방사능 사고에 직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러시아 측 인사인 예브게니 발리츠키 자포리자 임시주지사는 앞선 포격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도 우크라이나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폈다.
단일 단지로는 유럽 최대 발전소인 자포리자 원전은 3월 초 러시아군이 점령한 후에도 기존 회사 직원들이 운영을 맡아 우크라이나 전력의 20%를 공급해왔다. 최근 인근 교전의 여파로 보유한 원자로 6기 중 2개만 가동되고 송전선 4개 중 1개만 남은 상태였는데 이날 공격으로 유일하게 자국 전력망과 연결돼 있 송전선마저 손상된 것이다.
외신들은 단전 사태가 단순 포격이 아닌 러시아의 ‘전력 빼돌리기’라는 분석을 제기했다. 지난주 우크라이나 국영 원전 운영사인 에네르고아톰의 페트로 코틴 대표는 "러시아가 원전에서 생산된 전력을 크름(크림)반도로 보내는 '특수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면서 이 과정에서 원자로 냉각 시스템에 대한 전력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전력망 교체 중 90분 이상 냉각이 멈출 경우 원자로 온도가 위험 수위에 이르며 이로 인해 핵연료봉이 녹아내릴 경우 대규모 방사성 물질 유출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단트 파텔 미 국무부 대변인은 "자포리자 원전의 전기는 우크라이나에 귀속돼 있다"며 "발전소를 우크라이나 전력망에서 분리해 점령지로 돌리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이번 사태가 방사성 물질 유출 위기에 재차 경종을 울리며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현장 시찰단 파견에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된다. IAEA는 원전 포격의 책임을 둘러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공방으로 원전이 제대로 점검받지 못한 채 "통제 불능 상태가 됐다"며 양국의 협조를 촉구해왔다. 이에 우크라이나와 유엔은 원전 현장에 IAEA 시찰단을 파견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라파엘 그로시 IAEA 사무총장은 이날 “(러시아와의 합의에) 매우 근접했다”면서도 “더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직접 자포리자 원전 안정화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자포리자에서의 러시아 철수를 위한 국제사회의 개입을 촉구했다.
한편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군 병력을 기존보다 13만 7000명 늘리는 내용의 대통령령에 서명하며 우크라이나전이 장기화할 것임을 예고했다. AP통신은 “푸틴 대통령이 병력 손실을 보충하고 길고 힘겨운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대규모 군 증강에 나섰다”고 전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