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의 시발점은 이달 초 그리스의 좌파 야당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의 니코스 안드룰라키스 대표의 도청 의혹 제기였다. 그는 그리스 국가정보국(EYP)이 자신의 휴대폰에 감시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3개월 동안 불법 도청을 했다며 “국가정보국이 도청 내용을 총리에게 직보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폭로했다. 비난의 화살은 곧장 미초타키스 총리에게 향했다. 도청 의혹이 불거지자 국가정보국 수장은 자진 사임했고 미초타키스 총리는 “도청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며 서둘러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제1야당인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비롯한 야권은 이 사건을 ‘그리스판 워터게이트’로 명명하고 “현대화를 부르짖던 총리가 냉전 시절 정치 방식을 고수했다”며 미초타키스 총리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29일(현지 시간) 그리스에서는 이번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가 시작된다.
시장에서는 그리스 정정 불안이 초래할지 모르는 경제위기 상황에 대한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금융권 출신인 미초타키스 총리는 2019년 7월 총선에서 당시 집권당 시리자에 압승을 거두며 정권 교체에 성공한 후 친기업 정책과 국가 현대화에 집중해 그리스 경제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연합(EU) 예산감독기구는 이달 10일 그리스 정부에 대한 지출 감시를 종료하며 2010년 그리스가 국제통화기금(IMF), 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으로부터 동시에 구제금융을 받은 지 12년 만에 그리스의 위기 종식을 공식화했다. 그리스가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경제 개혁 조치를 효과적으로 이행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스는 11월 트로이카에 대한 마지막 구제금융 채권 상환을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정국 불안으로 시장에서는 그리스 경제에 몰아칠 정치발(發)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당장 그리스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도청 의혹이 터지기 전인 8월 1일 2.89%에서 26일 3.96%로 껑충 뛰었다. 로이터통신은 “그리스 국채금리 상승 속도는 드라기 총리가 사임을 발표한 이탈리아보다도 더 빠르다”고 전했다.
부채위기에 마침표를 찍었다지만 그리스의 부채 비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라는 점은 그리스의 앞날을 낙관할 수 없게 만드는 ‘뇌관’이다. 올 1분기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은 183.5%로 27개 EU 회원국 가운데 1위다. 이탈리아(152.6%), 포르투갈(127.0%), 스페인(117.7%) 등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다. 가디언지는 “부채 비율 증가는 그리스 정부가 팬데믹 기간 소상공인 등에 대한 재정 ‘퍼주기’에 나선 영향도 크다”고 지적했다.
외신들은 경제 개혁에 앞장섰던 총리가 낙마할 경우 새 정부가 또다시 그리스를 재정위기에 빠뜨릴 포퓰리즘을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지금은 그리스를 다시 걱정해야 할 때”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