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위대한 인물이 누군지 알고 싶으면 화폐를 보면 된다. 고대 일본을 지배한 쇼토쿠태자는 일본 화폐에 일곱 번이나 등장했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일본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아스카문화 시대를 연 것이다. 그는 한반도에서 물을 건너온 이른바 도래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찬란한 아스카문화를 꽃피웠다. 쇼토쿠태자가 세운 호류사에서 화룡점정으로 금당벽화를 완성한 담징이 대표적인 도래인이다. 한반도 도래인의 역사는 길다. 담징 이전에는 왕인과 아직기가 있고 더 멀리는 연오랑과 세오녀가 있다. 후세로 오면 정유재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도 있다.
최근 네이처지가 전한 일본 기초과학계 소식을 듣고 도래인이라는 단어가 새삼 떠올랐다. 네이처에 따르면 일본 국립 대학과 연구소 수십 곳에서 내년 4월부터 3100여 명에 달하는 연구자들의 10년 계약 기간이 종료된다. 일본은 2013~2014년 연구자들의 안정적 연구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0년 이상 일하면 정규직으로 고용되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경기 침체 등의 영향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만 정규직으로 고용될 예정이어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집단 이주한다면 우리나라는 열도 도래인들의 초격차 지식을 받아들여 단숨에 세계 일류 수준의 과학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산실인 기초과학연구원의 전체 연구자 수가 800명가량이니 열도 도래인들이 모두 대한해협을 건넌다면 기초과학연구원이 4개 가까이 생기는 셈이다.
일본 과학의 역사는 서양에 100년 이상 뒤졌다. 하지만 꾸준히 투자하고 연구해 사실상 서양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계 과학사에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25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그 증거다. 매년 10월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면 한국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왜 나오지 않는지를 놓고 말들이 많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초과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 30년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기초과학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의 수준 차이는 현격하다.
세상에 없던 산업과 제품을 만들려면 기초과학이 필요하다. 그동안 용케도 빨리빨리 정신으로 무장해 패스트 팔로어로 성공할 수 있었지만 전인미답의 퍼스트 무버로 거듭나려면 기초과학이 기반이 돼야 한다. 기초과학은 이제껏 해봐서 알듯이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기초과학 인재 양성이 쉽지 않다면 유치도 방법이다. 세계경제를 호령하는 미국도 따져보면 도래인이 만든 나라다.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대서양을 건너왔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희망봉을 돌아왔고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는 쿠바 출신 이민자인 새 아버지한테서 도전 정신을 배웠다. 포춘이 선정한 미국 500대 기업의 절반 가까이는 이민자가 창업했다.
멋진 도래인들을 유치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외국은 이미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인재 유치 작전에 나서고 있다. 호주는 적극적인 이민 정책에 힘입어 전체 인구 가운데 이민자 비중이 30%에 달한다. 특히 기술 이민이 전체 이민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코로나19 이후 세계 각국이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지만 기술을 갖춘 이민자들이 많은 호주는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고 있다. 세계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미국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포드는 최근 배터리 전문 인력 채용 공고를 내며 비자 스폰서십을 제공하기로 했다. 비자 발급을 내건 것을 보면 채용 대상이 외국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배터리 분야는 한중일 세 나라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니 사실상 한국과 일본 인재가 타깃이다.
우리 인재는 잡아두고 해외 인재는 끌어와야 한다. 그러려면 그들이 물 건너 왔을 때 제대로 정착하도록 도와주고 따뜻한 이웃으로 편견 없이 대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시급히 해야 할 일은 통합 이민법 제정이다. 이민 업무를 담당할 정부 조직도 설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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