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패권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여파로 국제 통상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교역량 위축과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사상 최대의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제정해 한국산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통상 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신냉전 시대를 맞아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며 “미국과의 전략 동맹을 중심에 놓고 지속적이고 세련된 다자 외교를 통해 우리의 국익을 지켜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의 가치 동맹에 초점을 맞추되 실질적인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가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14년 만에 처음으로 5개월 연속 무역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의 통상 전략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미중 간의 패권 경쟁, 코로나19 팬데믹,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3대 요인이 세계 경제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금융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제 규모가 커졌고 외환보유액도 많아 과거와 같은 큰 위기에는 직면하지 않을 것이다.
-대중국 무역수지가 5월 이후 3개월 연속 적자다.
△올해 한중 수교 30주년을 맞았다. 한국과 중국은 20년 전까지만 해도 보완재 관계였지만 10년 전부터 경쟁 관계로 바뀌었다. 중국은 한국·일본·대만 기업들의 노하우를 배웠다.
경쟁국을 규제로 묶어 놓고 ‘기술 굴기’에 나섰다. 디스플레이·전기차·배터리의 경우 10년 전만 해도 기술 격차가 컸지만 이제는 중국이 물량·규모에서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단계다. 중국과 격차를 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반도체 분야만 약간 여유가 있고 배터리는 기술력은 비슷한데 핵심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 만만치 않은 게임을 벌여야 한다. 철강·선박·자동차 분야는 중국과 전방위적인 경쟁을 벌인다고 봐야 한다.
-중국에 대한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는 얘기인가.
△문제는 이런 상황이 진행될 때 국가적인 전략이 없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는 끝없이 저자세를 보이며 기업의 문제는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래서 기업은 지난 10년간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경쟁자로 바뀌는 과정에 국가가 나서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의 고민을 중국에 전달하는 노력이 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어야 했나.
△정부는 정상회의·경제통상장관회의 등을 통해 기업이 제기할 수 없는 불만을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제기해야 했다. 기술 유출, 불공정 경쟁, 자유무역협정(FTA) 정신 위반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가 단독으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면 중국에 투자한 국가들과 힘을 합쳐서 풀어야 했다.
-미중 신냉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지구촌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화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 1990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이 사라지고 전 세계적으로 국가가 시민들을 더 잘살게 해주는 경제 전쟁의 시대가 시작됐다. 지난 30년 동안 체제가 달라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었고 기술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서나 부품을 구매해 완제품을 찍어낼 수 있었다. 이제 그런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반도체·전기차의 공급망을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끝나도록 만들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게 분명해졌다. 이제는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경제적인 효율성을 논의해야 한다. 어느 정도 가격 부담을 떠안고 효과적이지 않은 제품의 조달도 감수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칩4’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으로 보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집권 2기 때 중국 견제를 위해 워싱턴을 한 축으로 놓고 한 축은 유럽, 다른 한 축은 아시아와 협력하는 초대형 FTA를 추진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만들어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TPP에서 미국을 탈퇴시켰다. 미국에는 이제 국내적으로 FTA를 실행할 수 있는 정치력이 없다. 공화당은 자유무역을 찬성하지만 지역구의 이익을 반영하려 하고 민주당은 FTA가 환경·노동 문제에서 미국이 원하는 기준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찬성하지 않는다. 바이든 대통령은 FTA를 포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정부 주도로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IPEF를 찾은 것이다. 시장 개방을 안 하는 대신 생각이 비슷한 나라들이 비슷한 룰을 만들려는 것이다. 칩4도 반도체라는 핵심 고리를 가진 한국·일본·대만이 함께 만나 중국을 견제하는 반도체 공급망, 생태계를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그림이 없는 스케치에 불과하다. 중간 선거, 차기 대선 결과에 끊임없는 부침이 있을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공급망 배제 전략에 어떻게 대응할 것으로 보나.
△중국은 그동안 네 가지 방식으로 기술 굴기를 시도해왔다. 우선 국내 기업 보호다. 격차를 좁힐 수 있도록 엄청난 보조금을 준다. 둘째는 중국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전수 받는 것이다. 많은 경우 기술 이전을 강제한다. 투자 기업은 매력적인 중국 시장을 받는 대신 줘도 괜찮은 기술을 주는 것이다. 셋째는 전세계에서 인수합병(M&A) 사냥을 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파이를 이용하는 것이다. ‘천인계획’으로 많은 중국 군인들을 학생 신분으로 위장시켜 미국에 유학을 보내 기술을 탈취했던 게 보도됐다. 그러나 미국이 본격적으로 감시하면서 어려워졌다. M&A도 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이제는 자체적으로 굴기하느냐 아니면 중국에 투자한 기업들이 기술을 더 내놓도록 만드느냐 두 가지뿐이다. 중국의 플랜B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질서에 참여하는 한국에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그들이 생각하는 약한 고리가 한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일본은 확연하게 미국 줄에 서 있고 대만은 원차이나의 일부분이라고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해야 하니 스스로 미국이 주도하는 곳에 선다. 한국은 중국이 위압적으로 세게 나가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국이 그렇게 행동해왔다. 우파 박근혜 정부건 좌파 문재인 정부이건 중국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부가 잘 대처하고 있다고 보나.
△지금까지는 잘 하고 있다고 본다. 21세기 디지털 대변환의 시대에 핵심인 반도체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하겠다는 칩4에 안 들어가면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는 미국이 자국의 이해를 위해 무리한 법안을 들고 나온다는 점이다. 반도체에 있어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 10년간 중국에 투자를 못하게 하고 전기차는 미국에서 제조되지 않거나 미국과 FTA 체결 국가의 광물·배터리를 일정 비율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보조금 등의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이다. 한미 FTA를 체결한 한국이 이런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미국 정치권은 말로는 동맹을 내세우지만 동맹국과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정부는 이런 리스크에 잘 대응해야 한다.
-미국발 리스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혼자 대처할 수 없으면 유럽연합(EU)·일본 등 다른 국가와 연합해야 한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냄비처럼 대응하지 말고 지속적인 다자 외교를 펼쳐야 한다. 우리 핵심 목표는 반중 연대가 아니라 신냉전, 디지털 대변환, 팬데믹 시대에 흔들리는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번영에 앞서 생존의 문제다. 이 과정에서 중국 배제가 불가피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논리를 대통령부터 핵심 참모, 장관까지 익히고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중국 견제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순히 대응하는 것은 제대로 된 전략이 아니다.
-우리는 다자 외교에 약한 편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4년간 중국을 견제할 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때리든지, 아니면 EU와 일본을 끌어들여 공동 대응했다. EU와 일본이 외교의 핵심 고리인 셈이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EU는 한국이 진지하게 외교 파트너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중국은 거대 시장을 미끼로 EU와 가까워지면서 미국과 더불어 천하삼분지계를 형성한다는 장기 전략 속에 움직인다. EU는 우리처럼 안보는 미국과 경제는 중국과 연결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 전략을 펴왔다. 한국의 정치·행정가들은 우리가 일본·EU와 신냉전 시대에 한 배를 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적극 나서지 않으면 EU와 일본은 한국을 그들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워싱턴이나 베이징 눈치만 보는 것에서 벗어나 전략적으로 세련된 외교를 펼쳐야 한다.
-중국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중국과 우리가 같은 체제이면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이 확인됐다. 중국 공산당은 빨리 미국을 밀어내고 지역 맹주로 군림하겠다는 계산으로 움직이고 있다. 문제는 중국에 진출한 기업의 기술이 중국에 많이 넘어가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컨트롤타워를 설치해 반도체·배터리·드론·클라우드컴퓨팅 등 디지털 기술이 유출돼 우리에게 칼끝을 겨눌지 분석하고 통제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게 경제 안보 문제다. 중국 의존도를 줄여나가야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경제 안보를 챙기는 것이다.
-한국이 주도적인 통상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대한민국은 21세기 초반 10년은 적극적인 FTA 협상으로 주도적인 통상 리더십을 보였다. 늦게 시작했지만 선진국 시장을 개방하고 우리 시장도 여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박근혜·문재인 정부 기간은 통상 부문에서 ‘잃어버린 10년’이 됐다. 자만감에 빠져 한중 FTA에 올인하며 블록화한 TPP에 편승하지 못했다. 판을 잘못 읽고 중국에 낭만적으로 접근했다. 중국으로 하여금 평양을 부추겨 협상장에 나오게 하고 북한이 핵에 대해 자제할 것이라는 장밋빛 환상에 사로잡혔다. 이제는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면서 바람이 부는 방향을 잘 판단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He is···1958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통신개발연구원을 거쳐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WTO 기본통신협상 한국 수석대표에 이어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국제통상학회장·한국협상학회장.국제경제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SK그룹의 장학재단인 한국고등교육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