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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에 총 쏘고 탱크로 짓밟아"…발트3국, 고르바초프 추모 비판

1990년 소련 독립 무력 진압으로 민간인 희생

"서방은 동유럽을 신경 쓰지 않는다" 비판

2009년 10월 31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모습. 연합뉴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은 그가 생전에 무력으로 소련 독립을 진압했던 사실을 비판하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이 31일 보도했다.

서방은 고르바초프가 냉전 체제의 종식에 기여했음을 높게 평가한다.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이끌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발트 3국에게 고르바초프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그가 집권 중이던 1990년 발트 3국은 독립을 선언한 직후 소련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1991년에는 소련군 탱크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로 진격했다. 당시 충돌로 민간인 14명이 숨졌고 부상자도 700명이나 나왔다.

가브리엘리우스 란즈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이날 트위터에서 "우리는 고르바초프를 미화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의 군대가 우리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군인들이 민간인에게 총을 쏘고 탱크로 짓밟았다. 그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고르바초프"라고 강조했다.

같은해 라트비아에서도 학생 1명을 포함해 민간인 6명이 소련군에 의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사망한 리투아니아 민간인의 유가족은 로이터통신에 "전 세계는 고르바초프의 선한 면을 기억하지만, 그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에 기여했다는 점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무력 진압은 발트국 외에도 1986년 카자흐스탄, 1989년 조지아에서도 벌어졌다.

진압 시도는 헛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가 발트 3국 독립을 사실상 용인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발트국가의 독립은 막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1991년 8월 소련 내부에서 발생한 군 수뇌부의 쿠데타로 저지 동력이 완전히 상실됐다. 결국 소련 정부는 발트국가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이로 인해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입지도 흔들리게 됐다.

발트 3국 주요 인사들은 찬사 일색으로 고르바초프의 사망을 추모하는 서방 국가들의 분위기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투마스 헨드릭 일베스 전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서방의 추모 분위기에 대해 "동유럽은 신경도 쓰지 않나 보다. 우리의 비극은 상관이 없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에길스 레비츠 라트비아 대통령은 "우리는 고르바초프의 의지를 꺾고 독립을 탈환했다"고 썼다.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누가 평가하느냐에 달려 있다"며 "나는 고르바초프를 교도소장으로 본다. 그는 감옥을 개혁하겠다면서 외벽 페인트칠만 새로 하는 사람이다. 수감자들은 자유를 원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의 뜻을 어기고 탈출했다"고 말했다.

한편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오랜 투병 끝에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고인의 장례식은 이달 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고인의 딸 이리나가 현지 언론에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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