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신임 총리’ 리즈 트러스가 곧 ‘전 총리’로 바뀌게 된다. 45일, 역대 영국 총리 중 최단기 재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트러스 총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여러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고 하지만 그동안 영국 경제의 고질적 문제는 저성장이었기 때문이다. 감세를 통해 성장을 촉진한다는 구상 자체도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과 같은 긴축의 시절에 재정 부족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성장을 도모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무엇이 중요한 지에 대해 시장은 민감했고 트러스 내각은 둔감했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금융시장은 맥락에 어긋난 경제 정책을 용인하지 않았다. 채권 가격과 파운드화 가치가 급락했고, 영국 국채를 담보로 파생 상품에 가입한 현지 연기금들은 담보가치 하락으로 현금이 부족해졌다. 영국인들이 연금을 받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우려가 터져 나왔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앞서 금리 인상과 함께 양적긴축(QT)를 준비하던 영국 중앙은행(BOE)이 오히려 국채를 사들여 가격을 떠받치는, 즉 양적완화(QE)를 펼치는 모순된 상황이 전개됐다.
영국 연기금 사태를 통해 전 세계는 정부의 정책 판단에 따라 정권은 물론 한 나라, 나아가 전 세계 경제까지도 소용돌이칠 수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정치의 본질이 권력지향이다 보니 정치인들은 통상 감세나 각종 수당 지급 등 유권자들에게 인기 있는 정책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트러스 총리 사태는 유혹에 시달리는 각국 정부에 좋은 타산지석이 됐다. 적어도 고물가와 고금리가 판을 치는 현 시점에 재정 계획 없는 포퓰리즘 정책은 그 어떤 정부에도 유리하지 않다. 특히 요즘처럼 불확실성이 큰 경제 환경에서 잘못된 정책 리스크는 그 파급력이 더욱 강하다.
이번 영국 사태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이후 이어진 미국의 반응이다. 그동안 공격적 금리 인상 일변도였던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분위기가 최근 달라지기 시작했다. 메리 데일리 총재는 며칠 전 “이제 금리 인상의 속도 조절을 고민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불과 1주 전만 하더라도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기불황도 감수해야 한다고 하던 연준이다. 그새 인플레이션이 떨어진 것도 아니다. 달라진 점은 영국의 연기금 사태를 계기로 고강도 금리 인상이 전 세계에 불러일으킨 강달러 부작용이 미국 금융시스템으로 되돌아 올 가능성을 봤다는 점이다. 백악관과 재무부도 최근 연준과 금융 리스크 점검을 위한 회동을 했다고 한다. 제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국채 시장의 유동성 상실이 우려된다”며 관련 대책을 준비 중이다.
미국은 자국의 정책이 해외에 미치는 파급효과(spill-over effect)에 전통적으로 무심하다. 1971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존 코너리 재무장관은 당시 주요 10개국(G10)을 상대로 달러 가치가 떨어져야 한다고 촉구하며 “달러는 우리의 통화지만, 문제는 당신들의 것” 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힘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자국 중심적 정책 결정 방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일화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미국의 한 매체는 최근 연준의 금리 인상을 두고 “2022년 버전의 ‘우리의 달러, 너희의 문제’”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올 3월 연준의 금리 인상이 시작될 때부터 신흥국의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미국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마 영국이기 때문에 이들의 부실을 마냥 강 건너 불로 취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에 위험이 될 때 정책을 변경한다.
이는 돌려 말하면 미국의 정책 판단 영향으로 한국이 고통을 덜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통이 미국의 고통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해법은 경제 규모를 키우는 것일 수도 있고, 핵심 분야에서 한국에 대한 세계의 의존도를 높이는 것일 수도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석유가 있고, 일본은 미국 국채의 최대 보유국이다. 영국은 전통적인 금융 강국이다. 정부의 과제는 우리의 전략과 방법을 만드는 일이다. 이를 마련하지 못한 국가는 강대국이 내린 경제정책 결정의 후폭풍을 맞고 살 수밖에 없다. 성급하고 부실한 정책 대신 장기 경제 전략을 고민하라. 최근 영국 사태가 세계에 남긴 교훈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