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구리시 돌다리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잘 보지 못했던 노란색 설치물이 보인다. 얼핏 기둥처럼 보이는 구조물 한편에 문구가 써 있다. ‘잠시 앉았다 가세요.’ 시선을 돌리니 세로로 쓰인 글씨가 보인다. ‘장수 의자.’ 신호를 기다리면서 다리가 아플 수 있는 어르신들이 녹색등이 들어올 때까지 쉴 수 있는 작은 쉼터다.
용도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실상 주인공은 따로 있다. 최근 문화관광체육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한 ‘공공디자인 페스티벌’에서 특별상을 받은 유창훈(58) 포천경찰서 경무과장(경정)이다.
31일 서울경제와 만난 유 과장이 장수 의자를 만든 시기는 3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 파출소장으로 근무할 때 동네 어르신들이 횡단보도를 신호등도 무시한 채 건너는 모습을 수없이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치매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어르신들이 무단 횡단을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시는지 알기 위해 경로당에 찾아갔습니다. 대답이 너무 간단하더군요.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픈데 언제 신호를 기다리고 있어.’ 그때 의자를 만들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가더군요.”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얼마나 팔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뜻 만들겠다고 나설 공장을 찾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겨우 공장을 구하기는 했지만 제작 비용이 문제였다. 결국 특허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겨우 생산을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 모든 게 다 풀린 것은 아니다. 설치를 하려면 비용을 충당해야 하지만 지자체도, 경찰청도 고개를 저었다. 유 과장은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결국 내 돈을 털기로 했다”며 “250만여 원의 제작 비용을 석 달 할부로 해 별내신도시 17개 교차로에 60개를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만든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9년 전에는 주택가 가스 배관 등에 바르는 특수 형광물질을 개발해 절도 예방에 나섰고 2018년에는 도로교통공단과 협력해 횡단보도 바닥 발광다이오드(LED) 신호등을 개발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유 과장이 생활 속 아이디어를 꾸준히 내는 것은 경찰에 대한 신념 때문이다. 경찰이란 범죄자를 잡는 것만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다려서는 안 된다. 경찰이 먼저 벽을 허물고 대중에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무엇을 고민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경찰은 국민들이 넋두리할 수 있는 대상이 돼야 한다”며 “필요한 게 무엇인지 먼저 물어보고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인을 검거하는 것보다 예방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검거는 피해가 발생한 후 일어나는 일이다. 피해자들은 이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후다. 특히 성범죄의 경우 인격까지 말살해 평생 원상회복을 하기 힘들다. 피해가 일어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문제는 예방의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 과장은 “검거는 눈에 보이는 데이터가 있지만 예방은 그 효과를 입증하기 힘들다”며 “예방 업무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유 과장의 관점에서 볼 때 장수 의자나 LED 바닥 신호등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관점의 문제다. 공급자, 정부나 경찰 같은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잘 되고 있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인다. 국민의 시각은 정반대다. 온통 불편하고 부족한 것 투성이다. 해답은 바로 그 속에 있다. 그는 “불편함을 깨우치면 해결 방안은 바로 그 옆에서 찾을 수 있다”며 “모든 것을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유 과장은 아직도 할 일이 많다. 지하철처럼 중앙버스전용차로에도 스크린도어를 설치해 무단 횡단 사고를 막겠다는 생각도 있고 중앙선을 넘어 비보호 좌회전을 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일도 하고 싶다. 그는 “경찰을 그만두는 순간까지 국민 편의를 높이는 활동을 계속할 것”이라며 “이런 선한 영향력이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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