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정기국회 종료를 17일 남겨두고 또다시 졸속 입법 심의를 하고 있다. 입으로는 ‘민생 입법’을 최우선에 두겠다고 외쳐왔지만 정쟁에 발목이 잡혀 진도를 내지 못하다가 뒤늦게 허둥지둥 밀린 숙제를 벼락치기 하듯 한꺼번에 수백 건의 법안들을 상임위원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특히 산업 경쟁력에 숨통을 틔워주기 위한 반도체특별법은 내내 묵혀놓다가 뒤늦게 심의에 들어간 데다 야당은 삼성생명법(보험업법 개정안) 처리에 집중한 나머지 기업 발목 잡기에 골몰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22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를 열고 개인정보보호법 등 계류 중이던 법안 125건을 한 번에 상정해 심사했다. 상정된 안건 중에는 가상자산업법 10건과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삼성생명법도 포함됐다. 반면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산업은행 부산 이전’ 근거 마련을 위한 산업은행법 개정은 여태껏 추진이 지연되다가 이날이 돼서야 겨우 상정됐다.
교육위원회 상황도 만만치 않다. 국민의힘은 현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 교육교부금 개혁 법안을 뒤늦게 밀어붙이고 있다. 전날 법안을 전체회의에서 상정한 지 하루 만에 공청회까지 마치는 전례 없는 속도전을 보이고 있다. 해당 법안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일부를 고등교육에 투자하자는 내용이다. 등록금 인상이 어려워진 대학의 첨단 교육 시설 확충을 위해 교부금 활용이 불가피한 측면은 있지만 고등교육기관 이하 단위에서 수도권 과밀학급 문제 등이 여전한데 해당 재원이 부족해지는 게 아니냐는 논란을 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산업계에서 입법을 촉구해온 반도체특별법을 뒤늦게 논의 안건으로 올렸다. 올 8월 국민의힘 반도체특위가 법안을 발의한 지 16주 만이다. 산자위는 전날 중소벤처기업소위원회를 열어 논란이 끊이지 않는 납품단가연동제 심사에 착수하기도 했다.
기획재정위원회 산하 조세소위원회는 한 번에 세제 관련 개정안 257건을 논의 테이블에 올렸다. 주요 세제의 골격을 바꾸는 법안이 상당수지만 조세소위 구성이 늦어진 탓에 심사 기한(11월 30일)까지 채 10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야 논의를 시작했다.
국회 각 상임위가 정기국회 마감에 임박해 법안 논의를 서두르면서 졸속 심사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산자위 관계자는 “현재 산자위에 계류 중인 법안만 653건”이라며 “중요 법안을 먼저 처리하겠지만 오늘 상정된 안건에만 제정법이 3건을 넘어 정기국회 내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법안은 1만 2829건이다. 계류안이 가장 많은 상임위는 행정안전위원회로 1787건의 법안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각 상임위가 뒤늦게 법안 논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정기국회 종료 전까지 본회의 문턱을 넘는 것은 일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소관 상임위에서 의결을 마친 뒤 법제사법위원회 체계·자구 심사까지 끝내야 본회의에서 표결을 할 수 있어서다. 실질적으로 남은 법안 심사 기간은 2주 내외에 불과한 셈이다. 정기국회 종료 직전에는 여야가 세법과 예산안을 두고 신경전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 정작 민생법안 처리는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도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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