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신경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온통 집중된 사이 옛 소련의 친러 진영에서 내부 균열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23일(현지 시간) 러시아 주도로 옛 소련권 6개국이 참여한 집단안보조약기구(CSTO) 정상회의는 당초 러시아가 서방에 맞서 우방 세력을 규합하고 전황을 알리려는 취지로 열렸다. 하지만 막상 정상회의가 시작되자 곳곳에서 크렘린궁과의 엇박자가 부각되며 러시아에 새로운 골칫거리만 안겨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이날 “아르메니아가 CSTO 회원국임에도 아제르바이잔의 공세를 억제하지 못한 것이 실망스럽다”며 “여전히 CSTO 차원의 대응안을 결정하지 못했다. 이는 CSTO의 이미지를 심하게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2002년 결성된 CSTO는 러시아·벨라루스·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6개국의 군사·안보협력체다. 하지만 9월 아제르바이잔과의 국경 분쟁으로 대대적인 교전을 벌인 아르메니아의 지원 요청에 ‘안보 위협 공동 대응’을 약속한 CSTO는 물론 ‘큰형님’ 격인 러시아도 모르쇠로 일관하자 불만이 폭발했다. 파시냔 총리는 정상회의를 결산하는 공동 선언문 초안에도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동 대책이 충분하지 않다”며 서명을 거부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회담 기간 중 CSTO 탈퇴를 요구하는 반러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로이터통신은 파시냔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면전에서 CSTO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을 두고 “러시아가 장기간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전통적 텃밭으로 여겨온 일부 국가들에서도 영향력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고 평했다. 푸틴 대통령은 CSTO가 ‘몇 가지 문제’에 직면했음을 인정하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평화를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들어 본격적으로 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있는 카자흐스탄도 러시아에 전쟁 종식을 압박했다.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카자흐 대통령은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공동의 탐색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모든 전쟁은 협상을 통해 끝난다. 최소한 휴전을 위해 모든 기회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재선에 성공한 토카예프 대통령은 자국의 이익과 경제 발전을 최우선으로 삼아 서방·중국과 협력하는 외교 노선을 걷고 있다. 앞서 카자흐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병합 선언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를 추방하라는 러시아 측 요구도 거부한 바 있다.
로이터는 “전쟁 이후 러시아가 서방의 제재를 피해 새로운 시장과 교역로를 모색하자 옛 소련권 5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음을 깨닫고 점점 더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벨라루스는 이날 “우리 사이에 논란과 불화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러시아의 승패에 CSTO의 존폐가 달려 있다”는 성명을 내며 여전히 러시아의 최우방국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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