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이른바 3고(高)로 인한 경제위기가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최근 유가 및 곡물 가격의 상승 원인이 됐던 우크라이나 사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고 전 세계적 고금리 현상을 촉발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역시 상당 기간 긴축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은 4개월마다 발표하는 세계 경제성장 전망치를 매번 낮추고 있다.
이런 국제 여건에서 국내 경제 상황 역시 1997년 외환위기 못지않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우선 고금리로 빚이 많은 가계의 이자 부담이 급속히 증가하고 레고랜드 충격으로 시작된 금융시장의 자금난 역시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어 새로운 형태의 금융위기 발생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정치권은 당리당략에 매몰돼 민생 문제는 뒷전으로 미루고 있고 화물연대로 시작된 강성 노조의 불법행위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여건에서도 필자는 한 가닥 희망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 한국인은 평소에는 분열하다가도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협치와 화합의 정신을 발휘하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0년대 후반에 있었던 외환위기 극복 경험이다. 사상 초유의 국가 부도 사태를 맞아 IMF는 매우 강력한 구조 조정을 우리에게 요구했고 우리는 상당수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불과 1년 만에 위기를 극복하는 기적을 이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했고 노동계 역시 정리해고제를 포함한 노동 개혁에 합의했다. 이 모두 평상시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96년 당시 필자는 집권 여당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정조실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청와대가 정리해고제를 골자로 하는 노동관계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는 바람직한 조치이나 정권 말기에 추진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역부족이라는 의견을 당 지도부에 개진했다. 그러나 필자의 건의는 채택되지 않았고 급기야 오전 3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당 단독으로 관계 법안을 처리했다. 이러한 행동은 즉각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과 시위를 유발했고 대선을 코앞에 둔 여당은 당 대표 경질과 더불어 개정안을 다시 원상 복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국민적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똑같은 내용의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무난하게 통과됐다. 이는 경제위기라는 국민 인식이 노동계의 협조를 이끌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현재 경제위기는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외환위기는 아시아 신흥국에 국한됐으나 지금의 경제위기는 코로나19로 인한 국제분업 체계의 붕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중 간 패권 경쟁 등 전 세계적으로 얽혀 있어 그 해법 역시 간단치 않다.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대다수 선진국들의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환율의 평가절하가 수출 증가와 경제성장세 회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촌 전체가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겪고 있기 때문에 고환율임에도 불구하고 수출이 신장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이달 23일 한 가닥 좋은 소식이 여의도에서 들려왔다. 여야가 ‘이태원 참사’에 관한 국정조사 협상에서 전격적인 타결을 이끌어 낸 것이다. 또한 여야는 국회 내 ‘인구위기특별위원회’ ‘기후위기특별위원회’와 ‘첨단전략산업특별위원회’를 구성·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더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가 공통으로 공약한 정책과 법안을 입법화하기 위해 양당 정책위의장을 중심으로 ‘대선공통공약추진단’도 구성·운영한다고 한다. 언론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외에는 큰 뉴스로 다루지 않고 있으나 필자는 경제위기를 맞아 정치권이 적어도 정책 부문에서는 협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졌다는 측면에서 매우 소중한 합의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화물연대 파업 역시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노동계도 협치와 화합의 사회분위기에 동참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노사정 간 원만한 타협이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와 동시에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에서 부과되는 ‘세금 폭탄’ 해법도 여야가 함께 마련하기 바란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