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들이 일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많은 손끝에서 펼쳐지는 장삼의 하얀 곡선들. 조지훈의 시처럼 ‘얇은 사(絲) 하얀 고깔’은 없지만 ‘휘어져 감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은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한 줄기 강물처럼 연습실을 휘감아 돈다. 숨 막힐 듯한 아름다움이다.
군무를 이끄는 이는 올해 대한무용협회에서 최고무용가상을 수상한 국가무형문화재 ‘승무’의 채상묵(78·사진) 보유자다. 춤 하나로 63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채 보유자는 서울예술단 무용감독, 초대 한국전통춤협회 이사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과 겸임교수, 채상묵춤전승원 대표를 지냈다. 얼마 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공헌예술가상, 전통무용수지원협회에서 대상인 ‘아름다운무용가상’을 받기도 했다.
18일 서울 방배동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채 보유자는 ‘승무의 살아 있는 교과서’로 불린다. 승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곡선미다. 이전까지는 이 곡선을 얼마나 아름답게 표현할지에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곡선미도 중요하지만 장삼을 공중에 오래 떠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체공 시간이 길수록 곡선의 아름다움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채 보유자는 “옷감의 구멍을 줄이면 장삼이 오래 떠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승무복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며 “1985년 그 승무복을 입고 ‘공수래공수거’라는 작품을 공연했을 때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스승인 임해봉 선생의 춤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전통 춤을 춘다고 해서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채 보유자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한국무용과 서양음악의 접목을 처음 시도한 것도 그다. 1985년에 만든 ‘공수래공수거’라는 작품은 영화 ‘불의 전차’ OST 작곡가로 유명한 방겔리스의 ‘차이나(China)’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고 1987년 ‘비로자나불에 관한 명상’은 대중음악 가수 김수희의 ‘님’과의 접목을 시도한 것이다.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평단과 선배들로부터 ‘이단아’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래도 그는 굽히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 없이 작품을 만들다 보면 항상 똑같은 것만 하게 됩니다. 이러면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쟁 대신 첼로로 연주하면 어떨까, 웅장하고 에너지 넘치는 서양음악을 동양적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은 성공했죠.”
새로움을 추구한다고 전통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을 바탕으로 다른 것을 접목할 때 진정 한국적인 작품이 나온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우리 정서는 내팽개치고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하기도 한다. 채 보유자는 “전통은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고 뿌리다. 뿌리에 영양분을 많이 줘야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다”며 “중요한 것은 서양음악을 쓰더라도 한국적인 정서가 꼭 나와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정신 몰입’을 춤추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외형적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감성을 표현하는 것이 전통 춤의 요체라는 것이다. 훈련만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를 신체로 표현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가 무용수를 구도자(求道者)와 동일시하는 이유다. 채 보유자는 “춤이란 내면을 몸을 통해 외부에 전달하는 매개체”라며 “창작 춤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없지만 승무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감흥을 주는 춤꾼 정도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 흐르는 대로 거역하지 않고 기다리며 살다 보면 언젠가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전승 교육자를 제치고 이수자에서 바로 승무 보유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욕심을 버리고 춤에만 매달린 결과였다. 채 보유자는 “물이 앞서지 않고 바위에 부딪치며 흘러가다 보면 결국 바다에 도달하게 된다”며 “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후학들에게는 인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살아오면서 주변을 보니 인성을 바르게 지키며 산 사람이 별로 많지 않더라”며 “돈으로 명예를 가지려 하지 말고 예술 이전에 인간이 먼저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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