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작가에게 핑크빛 세계만 있는 줄 알았더니 차갑게 식어버린 잿빛의 세계가 있었다. 아름다운 줄로만 알았던 배우 송혜교는 그 세계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익숙한 이들의 낯선 하모니,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다.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연출 안길호)는 유년 시절 학교 폭력으로 삶이 무너진 동은(송혜교)가 가해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온 생을 걸어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이야기다.
동은의 삶은 처절하다. 부모도 돌보지 않는 어린 동은이 오로지 의지할 수 있는 곳은 학교였다. 하지만 학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동은을 감싸주지 않았다. 선생은 부모의 배경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이들은 모른 척했다. 그럴수록 가해자들은 자신만만해졌고 동은은 파괴됐다.
짓밟힌 동은의 유년 시절은 복수의 심지가 됐다. 온몸이 화상 자국으로 뒤덮이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복수만 생각하며 버텼다. 그렇게 동은은 가해자인 연진(임지연)의 초등학생 딸의 담임 선생님이 됐다.
작가의 이름을 모르고 보면 ‘김은숙’ 석 자를 떠올리기 쉽지 않다. 작품은 새벽녘 공기처럼 차갑고 휑한 느낌이다. 김 작가가 제일 잘 하는 간질거리고 몽글몽글한 러브 스토리와는 전혀 다르다. ‘비밀의 숲’ ‘왓쳐’ 등 장르물의 대가, 안길호 감독과 김 작가의 첫 호흡은 꽤 괜찮아 보인다.
몰입도를 높이는 필력은 김 작가답다. 캐릭터가 모두 살아 있고 흥미롭다. 살고 싶지 않던 동은이 복수를 다짐하고 불도저같이 앞만 보고 사는 것, 그런 동은 앞에 나타나 연애와 연대 사이 관계를 만드는 여정(이도현), 그리고 동은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이기적인 학폭 집단의 우두머리 연진까지.
탁월한 캐스팅을 보는 재미도 있다. 회차가 갈수록 동은의 얼굴을 한 송혜교는 새롭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어도 송혜교는 빛난다. 생기 없이 건조한 얼굴, 세상 모든 것에 초연한 눈빛이 그를 동은으로 보이게 한다. 이도현은 그런 송혜교와 균형을 맞추며 작품 속 온기를 담당한다.
악역에 도전한 임지연의 날카로운 연기는 송혜교와 또 다른 축이다. 여기에 각각 동은과 연진의 어린 시절을 그린 배우 정지소, 신예은은 극 초반 집중도를 높인다.
무엇보다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강렬하다. 고등학생 딸을 둔 김 작가에게도 가까운 이야기인 학폭. 김 작가는 가해자에겐 가벼운 장난으로 치부되는 학폭이 피해자에겐 살아서 겪는 지옥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그려냈다. 동은을 통해 피해자의 삶이 내몰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동은의 복수는 더 잔인하게 그렸다. 19금 선택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김 작가의 회색빛 세계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파트2까지 마련돼 총 16부작으로 완결된다. 파트2는 내년 3월 넷플릭스에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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