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과 반도체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기술이다. 이러한 두 핵심 기술을 연결해주는 제품이 AI 반도체다. 세계 많은 나라에서 AI 반도체 개발 경쟁이 치열하며 우리나라에서도 정부의 선제적 지원과 벤처캐피털의 적극적인 투자에 따른 국산 AI 반도체 개발이 활발하다. 정부에서는 국산 AI 반도체 활용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국산 AI 반도체를 사용해 데이터센터를 만들고 이를 활용하도록 지원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 정책은 올바른 방향이지만 서둘러 추진되는 경우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려되는 점이 있다.
현재의 AI 반도체 개발 단계와 유사한 상황이 1990년대 초 중반 무렵에도 있었다. 당시에는 병렬처리 컴퓨터의 상용화가 막 시작되는 초기 단계로 많은 스타트업 회사들이 기술 경쟁을 하고 있었다. 병렬처리 컴퓨터란 여러 개의 CPU 코어를 활용해 속도를 높이는 기술로서 현재 대부분의 컴퓨터에서 채택하는 기술이 됐지만 1990년대에는 아직 불안정한 초기 단계의 기술이었다. 당시 필자는 박사과정 학생으로 병렬처리 컴퓨터를 사용해 프로그래밍을 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담당교수가 직접 개발한 새로운 병렬처리 컴퓨터로 프로그래밍을 하는 과제를 수행했다. 그런데 그 컴퓨터에 오류가 많아 정상적인 프로그램도 동작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상 프로그램을 수정해 그 컴퓨터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회 경로(work-around)를 찾아야 하는 불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학점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과제를 완성했지만 그 수업이 끝나고 다시는 그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그 컴퓨터에 대한 나쁜 평판이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들로부터 널리 퍼지게 됐다.
아직 국산 AI 반도체는 성능과 동작 안정성이 확실히 검증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둘러 많은 사용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추진하다가 만약 사용자들이 실망하고 나쁜 평판이 퍼지면 국산 AI 반도체의 활용이 시작 단계부터 꺾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크다. 따라서 국산 AI 반도체의 활용에는 단계별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국산 AI 반도체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 우선 성능 면에서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용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 또한 동작 안전성 평가를 통해 오류가 있는 기능에 관해서는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국산 AI 반도체의 오류를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래밍 환경이 제공돼야 한다. 오류의 우회 경로를 제공하는 라이브러리 프로그램과 이를 활용한 예제 프로그램들을 함께 개발해 제공함으로써 사용자가 쉽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 마침내 프로그램 개발자가 사용할 수 있도록 국산 AI 반도체를 제공한다. 다만 이 단계에서도 일반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의 동작을 이해하고 초기 동작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우회해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는 사용자에게만 개방을 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친 후에 마지막 단계에서 비로소 일반 사용자들에게 개방한다면 국산 AI 반도체를 쉽게 받아들이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앞으로 국산 AI 반도체가 많은 사용자에게 활용될 가능성은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왜냐하면 고성능 AI 반도체의 가격이 무척 비싸기 때문에 이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프로그램 개발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의 AI 반도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은 응용 프로그램도 처리 시간이 하루 이상 걸리고 규모가 큰 응용 프로그램은 일주일 이상 걸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국산 AI 반도체의 성능이 최고 수준이 되지 못하더라도 기존의 저성능 AI 반도체보다 수준이 높다면 이를 원하는 사용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산 AI 반도체의 활용이 확대되고 이를 통해 오류를 수정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것이 AI 반도체 성공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를 위해 서두르지 않는 정교한 단계별 활용을 위한 정부의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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