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전성기 때 일본의 공장들은 주로 교외에 자리했습니다. 지금은 낙후된 그 지역들이 미국 애리조나처럼 반도체 산업으로 다시 살아나기를 일본은 원합니다.”
미국 워싱턴 DC에서 만난 일본의 한 소식통은 최근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협력이 확대되는 것을 두고 이 같은 기대를 드러냈다. 한때 첨단 기술로 세계시장을 지배했던 일본은 반도체 산업을 빼앗긴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TSMC와 인텔의 공장이 들어서는 미국 애리조나의 변화는 그런 일본을 더 자극하고 있다. 척박한 기후 조건에도 불구하고 애리조나는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에 힘입어 반도체 제조 메카로 변신 중이다. 지난해 기자와 만난 카일 스콰이어스 애리조나주립대(ASU) 공대 학장은 “이곳은 전 세계 반도체 인재와 산업의 블랙홀”이라고 말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주도한 반도체 공급망 재편의 거점이 애리조나이기도 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TSMC 공장을 찾아 “(이곳에서 생산될)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된 칩들이 아이폰과 맥북에 전원을 공급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공급망이 취약한 일본 입장에서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 일본과 미국의 반도체 밀월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반도체 제조업은 쇠락했으나 기술과 장비·소재를 지배하는 두 나라 간의 협력이기 때문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과 니시무라 야스토시 일본 경제산업상은 5일 워싱턴DC에서 열린 회담에서 첨단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반도체를 공동 개발·양산하는 데 뜻을 모았다. 이 막중한 역할을 맡은 곳은 미국의 IBM과 일본의 라피더스. 라피더스는 일본 메모리를 대표하는 기옥시아를 비롯해 소니·덴소 등 대기업 8곳이 뭉친 연합군이다. 1980년대 무역 분쟁을 겪은 미국과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부활을 위해 다시 뭉친 것이다. 2나노는 삼성전자와 TSMC도 아직 양산하지 못한 영역이다.
이와 별도로 TSMC의 일본 투자도 속도가 붙고 있다. 일본 구마모토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 중인 TSMC는 일본 내 두 번째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TSMC의 첫 공장 건설에만 투자비의 절반에 가까운 4조 6000억 원을 지원했다. 자국 내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려는 미국과 일본, 지정학적 위험을 분산하려는 TSMC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결과다.
물론 이 같은 움직임만으로 반도체 시장의 재편을 거론하기는 이르다는 평가도 있다. 미국 내 한 반도체 업계 전문가는 “IBM의 반도체 기술력은 압도적이나 파운드리와 메모리 시장 모두 TSMC·삼성·SK가 완벽히 지배한 상태에서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설사 기술이 있다 해도 2나노 양산을 위해서는 수십조 원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일본이 그 리스크를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같은 현실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안보’로 끈끈히 밀착하며 첨단 기술 패권을 다시 쥐려는 일본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일본은 지난해 말 안보 문서 개정을 통해 ‘반격 능력’ 확보를 천명하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불침항모(不沈航母)가 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대대적인 방위비 증액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고 일본 내 전략적 요충지에는 미군 항공모함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중국 견제’라는 미국의 목표에 적극 호응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경제 블록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전략이 이번 미일정상회담을 통해 구체화됐다.
일본의 반도체에 대한 집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 대중 반도체 수출규제 등 우리 기업들의 생사를 좌우할 이슈도 미국과 일본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반도체·배터리로 엮인 한미 경제동맹이 워낙 끈끈하지만 결코 방심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을 찾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미일 동맹이 이렇게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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