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BOJ)이 일각의 예상을 깨고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는 대신 국채금리를 낮게 유지하기 위해 은행을 동원하는 추가 조치를 내놓았다. 전문가들은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가 시장을 향해 ‘중앙은행에 맞서지 말라’는 엄포를 놓은 것으로 해석했지만 투자자들이 앞으로 계속 BOJ를 시험하며 시장 변동성은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18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BOJ는 이틀간의 정책결정회의 끝에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10년물 국채금리 상하한선을 ±0.5%로 설정해 이를 벗어나는 국채는 무제한 매입하는 ‘수익률곡선통제(YCC)’ 정책을 만장일치로 유지하기로 했다. 구로다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장기금리 상한선 인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못박은 뒤 완화책을 계속해 “기업이 임금을 올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장기금리를 일정 수준 아래로 유지하면서도 BOJ가 직접 대규모 국채를 사들이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금융사를 활용하는 보완책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은행 등이 보유한 채권을 담보로 BOJ가 돈을 빌려주고 은행은 이 돈으로 국채를 사는 ‘공통담보자금공급 오퍼레이션’ 정책을 확대 시행하기로 했다. 종전에는 2년간 은행에 제로금리로 돈을 빌려줘 2년물 국채를 매입하도록 유도했지만 이번에는 10년까지 대출 기간을 늘리되 금리를 올려 은행이 장기채를 매입하도록 했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의 마스지마 유키는 이번 결정을 “BOJ에 맞서지 말라는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특히 이날 발표한 수정 경제전망에는 BOJ가 계속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뜻이 엿보인다. BOJ는 2022회계연도(2022년 4월~2023년 3월)의 물가 상승률을 3.0%(신선식품 제외)로 지난해 10월 전망에서 0.1%포인트 상향했지만 2023년은 1.6%의 기존 전망을 유지하고 2024년도 1.6%에서 1.8%로 소폭 올리는 데 그쳤다. 중기적으로도 물가 상승률이 2% 목표에 못 미칠 것으로 본 것이다. 경제성장률도 2022년은 2.0%에서 1.9%, 2023년은 1.9%에서 1.7%, 2024년은 1.5%에서 1.1%로 일제히 낮춰 잡았다. 블룸버그는 “4월 이후 새 리더십 체제에서도 계속 완화 정책을 펴는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BOJ가 완화 기조 고수를 천명하자 엔화 가치와 국채금리는 급락했다. 이날 발표 전 달러당 128엔대에서 거래되던 엔·달러 환율은 발표 직후 131.58엔까지 오르며(+2.4%) 2020년 3월 이후 하루 최대 상승률(엔화 가치 급락)을 기록했다. 10년물 국채금리는 오전에 0.502%에서 0.348%까지 급락했으며 닛케이225지수는 2.5% 급등 마감했다.
다만 시장에서는 BOJ와 시장 간 힘겨루기가 시작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40년래 최고 수준인 물가를 통화 긴축으로 잡으라는 정치권의 압력이 커질 수 있는 데다 4월에는 구로다 총재의 임기 만료도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라고 봤다가 뒤늦게 금리를 급격히 올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BOJ가 결국 출구전략에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BOJ의 말이 아니라 물가 등 지표에 집중해야 한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캐피털이코노믹스의 마르셀 티엘리앙은 “고물가가 소비심리와 정부 지지율에 부담을 주고 있어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물가 급등에 불만을 가진 상황”이라며 “새 총재가 취임하는 4월에 YCC가 폐기될 것”이라고 점쳤다.
이에 따라 시장 변동성도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 분석 업체 SAV마켓의 샴 데바니는 “BOJ가 3월에도 현 통화정책을 유지하면 엔·달러 환율은 135엔 수준으로 오를 것”이라고 전망한 반면 노무라증권의 고토 유지로는 “정책 변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2~3개월 동안 환율은 125엔대를 향해 하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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