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영화 ‘정이’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배우 고(故) 강수연을 회고했다.
18일 오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정이’의 연상호 감독 인터뷰가 진행됐다.
고 강수연의 마지막 작품이 된 ‘정이’는 급격한 기후변화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벗어나 이주한 쉘터에서 발생한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설적인 용병 정이(김현주)의 뇌를 복제,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SF 장르물이다. 강수연은 정이가 식물인간이 되고 35년 후 정이 프로젝트의 연구팀장이 된 딸 서현 역을 맡았다. 그는 ‘정이’ 마무리 단계였던 지난해 5월, 갑작스레 뇌출혈 증세로 쓰러진 뒤 사흘째 의식불명이다가 세상을 떠났다.
연 감독은 “강수연 선배님이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마지막 후시 녹음을 할 때 코로나가 조금 풀릴 때라 자리를 마련하자고 하셔서 내가 금방 날을 잡겠다고 한 게 마지막이었다. 또 보통 촬영 중에 메이킹 인터뷰를 따지 않는데 ‘정이’는 세트가 멋있는데 끝나고 부시니까 아까워 사전에 인터뷰를 했다”며 “어떻게 보면 ‘정이’라는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다 하고 가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평소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 같은 게 반영된 게 아닌가 싶고 신기하다. ‘진짜 영화같이 사셨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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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감독의 말처럼 강수연은 주어진 일을 모두 해내고 떠났다. SF 영화라는 장르 특성상 모든 계획이 들어맞아야 했고, 계획대로 완성됐다. 연 감독은 “세트를 목공으로 만드는데 겉보기엔 그럴듯하지만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아무리 음향을 잘 만들어도 소리가 난다”며 “전체 대사를 후시녹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이어 강수연의 별세로 편집 방향에 변한 건 없다며 “내가 왜 이렇게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떠올리고 이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 후반 작업하면서 느낄 수 있었다”고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컴퓨터 파일 속에 묻힐 뻔한 ‘정이’가 영화화될 수 있었던 건 연 감독이 강수연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연 감독의 머릿속에 서현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로 강수연이 떠오르면서 영화로 만들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강수연과 일면식이 없던 그는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받고 문자를 보냈다가 답을 받지 못했었다고. 그는 “나중에 왜 답장이 없었냐고 했더니 스팸 문자인지 알았다고 하더라. ‘이 사람이 나한테 연락할 리가 없는데 사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밝혀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선배님을 실제로 보니 내가 알던 모습과 달랐다”며 “정말 멋있고 로커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가 구체화 됐다”고 회상했다.
연 감독은 강수연이 담백하게 ‘한 번 해보자’라는 말로 캐스팅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이후 강수연은 작품 활동에 긴 공백이 있었고 배우로서 처음으로 도전하는 장르였지만 단단하게 중심을 잡아줬다. 연 감독은 “돌이켜보면 본인이 경험해 본 환경과 달랐을 텐데 어른으로서 현장을 잘 지탱해 줬다는 생각이 든다. 또 현장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배우인데 왜 그동안 작품을 안 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며 “‘정이'라는 작품이 한국에서 잘 시도되지 않은 SF영화인데 그런 후배를 지지해주신 게 아닐까 싶다”고 짐작했다.
한편 ‘정이’는 오는 20일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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