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잠재성장률이 계속 내려가는 것입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달 10일 신년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 경제의 당면 과제에 대해 이 같은 진단을 내렸다. 지금 경제에 부담이 되는 인플레이션 등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되겠지만 잠재성장률 하락은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한 총리의 지적대로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너무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1988년 9.69%로 정점을 찍은 뒤 1989년 9.56%, 1997년 6.97%, 2003년 4.91%, 2016년 2.90%로 수직 낙하했다. 지난해는 2.02%를 기록하면서 간신히 2%대에 턱걸이했다.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1%대 추락은 시간문제다.
주목해 볼 대목은 광복 이후 추세적 상승세를 보이던 잠재성장률이 하락세로 돌아선 시점이 대기업집단 규제가 시작된 때와 맞물린다는 점이다. 잠재성장률은 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공정거래법이 개정된 이듬해인 1988년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35년 만에 성장률은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출자총액 제한과 상호출자 금지, 공시대상 기업 지정 등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성장 엔진이 식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의 성장 동력이 약해지고 있는 모습은 포춘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500대 기업 현황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500대 기업에 포함된 우리나라 기업 수는 16개에 불과하다. 7년 전인 2015년(17개)보다 1개가 줄었다. 기가 막히는 것은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이 한창인 가운데서도 신산업 분야에서 500대 기업에 들어간 한국 기업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성장 동력의 약화는 규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온갖 규제를 가한다. 대기업에 대한 차별 규제만 무려 275개에 달한다. 이러니 성장이 될 리가 없다.
한국의 후퇴는 인접국인 중국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2015년만 해도 중국의 500대 기업은 98개로 미국(128개)보다 적었지만 이후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성장세를 보이면서 2020년부터 미국을 추월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136개로 미국(124개)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대기업집단 규제의 가장 큰 문제는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규제 대상을 지정하는 기준이 자산총액에서 자산 순위로, 다시 자산 총액으로 오락가락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산 5조 원, 10조 원이 우리 경제 전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규모인지에 대한 근거도 없다. 특히 국내 10대 기업들은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이렇게 해외에서 수익을 창출한 기업에 대해 자산이 늘었다는 이유만으로 규제를 가하는 황당한 일이 계속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기업 규제가 도입될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1987년에는 우리나라의 개방도가 낮아 일부 기업이 독점적 이윤 추구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장 개방도가 90%를 넘어섰다. 이 때문에 외국 기업의 진입이 용이해져 국내 기업의 시장독점은 쉽지 않다. 경제력 집중도도 과거보다는 많이 완화됐다. 한때 40%를 넘었던 30대 그룹의 매출 비중은 30% 정도로 낮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폐쇄경제 시절 만들어진 규제법을 고집하는 것은 성장 동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물론 잠재성장률 하락이 전적으로 대기업 규제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기업들이 이런 모래주머니를 달고 글로벌 플레이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를 감안해 18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해외 기업인들과의 회동에서 “제도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진정 제도 개혁에 뜻이 있다면 그 출발은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갈라파고스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런 것이 존재하는 한 기업 역동성이 살아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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