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 하나 짓는데 경쟁국은 3년, 우리는 8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국무회의에서 “더 민첩하고 유연한 정부로 거듭나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꺼낸 얘기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공장 부지 선정에서 가동까지 걸리는 기간이 ‘용인 8년, 평택 7년, 가오슝(대만)·텍사스(미국) 3년, 시안(중국) 2년’이라는 통설이 퍼져 있다. 공장 건설에서 중국에 비해 무려 4배의 기간이 소요되는 현실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반도체 등 전략산업의 미래가 밝을 수 없다.
공직자들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과 보신주의, 복지부동의 자세로는 숨 가쁘게 전개되는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에 대처할 수 없다. 지난주 산업통상자원부는 역대 최대 규모인 360조 원의 무역금융 공급 등 수출지원책을 내놓았지만 뒷북 대처였다. 정부가 좀 더 일찍 움직였다면 올해 1월 126억 9000만 달러에 이른 무역수지 적자를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에너지 위기가 예견됐는데도 관련 부처는 ‘난방비 폭탄’에 대비하지 못하고 뇌관이 터지기 직전까지 방치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행과 규제의 틀을 과감하게 깨야 한다”면서 공무원들에 대한 민간 수준의 파격적인 보상을 시사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 이후에도 공무원들은 눈치를 보면서 노동·연금·교육·공공·규제 개혁에 발 벗고 나서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지금 공직자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보상보다 기강 확립이다.
40년 전 삼성이 ‘도쿄 선언’과 함께 반도체 산업에 진출했을 때 한국은 미국·일본 등 경쟁국들이 18개월 이상 걸리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6개월 만에 해냈다. 당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기업의 과감한 투자가 맞물린 속도전으로 우리는 ‘메모리 반도체 글로벌 1위’의 아성을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 마이크론이 뉴욕 신공장을 3년 만에 준공하는 반면 SK하이닉스는 2019년 공장 부지 선정 이후 토지 보상, 용수 인허가 등에 발목이 잡혀 2027년에야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가동한다. 전 세계에서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애자일(agile·민첩한) 정부’로 거듭나지 않으면 글로벌 정글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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