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 매스컴의 헤드라인에 자주 나오는 키워드는 공급망이다. 공급망이라는 용어 뒤에는 분단·교란·재검토·재편 등 이런저런 말이 따라붙는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의 주된 원인은 미국과 중국의 대립, 중국의 계속된 도시 봉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다. 일본의 관점에서 보면, 공급망 불안은 특히 중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중국과의 무역 규모가 큰 가운데 미·중 마찰과 같은 지정학적 리스크로 인해 중국에서 들어오는 원부자재 조달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또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 제품의 미국 수출이 불리해지는 등 비즈니스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
일본 정부와 업계는 공급망 재편에 대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5월 경제안전보장추진법을 제정해 반도체 등 주요 물자의 공급망 강화를 위한 체계 구축에 나섰다. 이 법은 기본적으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기업이 주요 물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 협력해 첨단반도체에 대한 공동 연구개발(R&D)도 추진하고 있다. 기업들도 부품·소재 조달을 포함해 중국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생산거점 재배치 등 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의 최대 교역국이다. 2021년 일본의 대중국 교역액은 38조 엔(약 365조 원)으로 전체 수출입액의 22.8%를 차지한다. 이런 상황이라 일본 내에서도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단기적으로 쉽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일본은 미국과 보조를 맞출 수 밖에 없으므로 탈중국 움직임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공급망 변화 대처와 관련해 일본 업계의 중국 비즈니스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 일본 기업들은 중국 내 생산거점을 옮기고 있다. 생산공장을 중국 이외 국가로 다각화하는 ‘중국 플러스 알파’는 물론, 최근에는 일본 국내로 복귀하는 리쇼어링 사례도 다수 보인다. 제국데이터뱅크 통계에 따르면 2022년 6월 기준 중국에 진출한 일본 기업은 1만2706개 사로 2020년에 비해 940개 사가 줄었다.
둘째, 공급망 단절에 대비한 대체 조달처 확보 또는 복수공급망 체제 구축 움직임이 나타난다. 특히 핵심부품이나 소재의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지난 6월 일본정책투자은행이 대기업 2000개 사를 대상으로 공급망 리스크 대책을 조사해 보니 역시 ‘해외 조달선의 분산·다양화’가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셋째, 공급망 혼란은 일본 제조업계의 생산방식도 바뀌고 있다. 일본 업계는 적시에 필요한 만큼 부품을 조달해서 생산하는 ‘저스트 인 타임’(JIT) 방식을 중시해 왔다. 재고를 최소한으로 두고, 비용을 낮추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유사시에 대비해 재고를 늘리는 ‘저스트 인 케이스’(JIC)로 전환하고 있다. 재고 증가로 비용이 오르더라도 대외 변수로 인해 공장이 멈추는 사태는 피하겠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JIT의 상징인 도요타도 2021년 가을부터 차량용 반도체 재고를 늘리고 있다고 한다.
넷째, 탈중국 흐름과 관계없이 소비재 분야 등에서는 거대한 중국 시장을 겨냥해 중국내 생산을 늘리려는 모습도 보인다. 일본에는 ‘지산지소(地産地消)’라는 용어가 있다. 수요가 있는 지역에서 생산한다는 뜻으로 원부자재는 대부분 현지 또는 인근 지역에서 조달하게 된다. 최근 파나소닉은 2024년까지 중국에 500억 엔을 투자해 가전·공조기기 공장을 10개 이상 만들거나 증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은 우리 업계에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동시에 기회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일본 기업의 생산거점 다각화, 주요 부품에 대한 대체조달처 모색 등에 따라 새로운 수요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쿄를 비롯한 일본 지역 KOTRA 무역관에 일본 기업들이 찾아와 기존 공급선에 대한 우려를 토로하면서 대체 제품을 공급해줄 수 있는 한국 기업이 있는지 문의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리 수출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본에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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