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여럿 있다. 그중 하나가 포토맥강 건너 알링턴 국립묘지 바로 옆의 나지막한 언덕이다. 국회의사당과 링컨기념물이 한눈에 보이는 이곳의 ‘미 해병전쟁기념물(Marine Corps War Memorial)’은 펄럭이는 대형 성조기로 유명하다. 기단에는 해병대의 구호인 ‘영원한 충성(Semper Fidelis)’이 새겨져 있다.
1941년 12월 9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3년 반 이상 전개된 치열한 전투 중 하나가 이오지마 전투다. 한국인에게는 유황도로 알려진 이오지마는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연결하는 항공 수송의 중계 지점이었다.
1945년 2월 19일 이 섬에 상륙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3월 17일 섬 전체를 장악하기까지 미군 진영에서만 3만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의 피해도 막대했다. 전체 병력 2만 1000여 명 가운데 1만 8000여 명이 숨지고 나머지 대부분도 행방불명됐다. 일본군 대본영은 이 끔찍한 결과를 ‘옥쇄’라는 말로 미화했다. 구슬처럼 아름답게 산화했다는 군국주의 시대의 표현이다.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2월 23일에 끝난 스리바치 고지 전투다. 이 전투는 AP통신 소속의 조 로젠털이 촬영한 사진 덕분에 태평양전쟁의 상징이 됐다. 활화산인 스리바치 정상에 여섯 명의 해병 용사가 거대한 성조기를 꽂는 모습은 그해 퓰리처상을 받으며 미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조각가 펠릭스 드웰던도 그중 하나였다. 사진을 바탕으로 해병대원 6인의 행동을 역동적으로 재현한 그의 시작품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미 해군의 역사를 대표하는 기념물로 탄생했다. 바람 부는 날 황혼을 배경으로 한 이 기념물은 미국 애국주의의 표상으로 손꼽힌다. 최호근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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