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이 됐다. 사상자는 러시아군 18만 명, 우크라이나군 10만 명에 이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림반도부터 흑해 연안을 따라 동부 돈바스에 이르는 자국 점령지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 또는 완전자치구역으로 인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포기할 때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기세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빼앗긴 영토를 완전히 수복하기 전까지 종전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다. 여기에 더해 2024년 러시아·우크라이나·미국에서는 모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우크라이나 전황에 따라 유권자들의 표심은 출렁일 것이다. 종전보다는 결전의 의지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서방은 러시아의 봄 대공세를 당연시한다. 미국과 독일은 지상 최고 전력을 자랑하는 탱크 ‘M1 에이브럼스’와 ‘레오파르트2’를 우크라이나에 보내 맞서기로 결정했다. 기존의 대전차미사일 ‘재블린’, 고속기동로켓 ‘하이마스’, 드론 ‘바이락타르’ 등이 주로 방어용이었다면 이번에 지원되는 탱크는 공격용이다. 러시아도 이에 맞서 서방의 지원으로 크림반도가 공격받을 경우 핵무기를 동원한 확전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핵보유국이 재래식 전쟁에서 패배하면 핵전쟁이 촉발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확전으로 가든, 상호 으름장에 그치든 우크라이나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언젠가 종식될 것이다. 하지만 전쟁 발발 이전의 세계는 다시 오지 않는다. 탈냉전 이후 미국의 단일 패권 아래 중국과 러시아, 심지어 이란까지 동참하던 세계화 시대는 끝났다. 세계는 다시 나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무엇보다 세계화 시대를 주도했던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자리한다. 피터 자이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발간한 저서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에서 세계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이 만들어내는 탈세계화의 암울한 미래를 실감나게 그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나는 미국 주도의 탈세계화 징후는 동맹이나 우방에 대한 전면 지원이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전 세계에 공공재를 무한 공급하는 시기는 끝났다는 선언이다. 첫 출발이 ‘무기는 보낼 수 있지만 자국 군대는 보내지 않는다(No Boots On The Ground)’는 원칙이다. 게다가 무기도, 전쟁 비용도 동맹국들이 분담해야 한다.
미국은 동맹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도 동맹이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것은 묵과하지 않는다. 미국은 세계화 시대에 허용되던 동맹과 비동맹국 간의 협력, 특히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 맹주 간 통합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있다. 이미 2012년 존스홉킨스대의 켄트 콜더는 저서 ‘신대륙주의’에서 중동 에너지 국유화, 이란 혁명, 중국과 인도의 개혁개방, 소련의 붕괴와 푸틴의 등장으로 통합되는 유라시아 대륙의 에너지네트워크가 미국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미국 행정부의 세계 전략을 이끌었던 세계적 지정학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중국·러시아·이란의 반미 연합전선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맥을 같이한다.
콜더도, 브레진스키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바로 독일이다. 독일이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 통합에 본격 뛰어든 것이다. 독일 산업계는 중국 개방 직후 기술표준화 사업을 돕고 독일의 제조 장비를 대량 공급하면서 대외 경제 협력의 중심을 중국으로 옮겼다. 2005~2021년 독일의 대외 상품 수출이 67% 증가할 때 중국과의 교역은 400% 늘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에서 독일과의 가치사슬 연계는 핵심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에너지와 교통을 매개로 독일과 중국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중국의 일대일로 네트워크는 러시아를 거쳐 독일에서 마무리됐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발트해를 잇는 러시아 가스관 ‘노르트스트림2’를 완공해 결과적으로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가스 안보를 위협했다. 결론적으로 중국·러시아·이란·인도로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통합을 독일이 완성한 셈이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바로 이 통합에 치명상을 입혔다. 이탈리아 언론인 마르코 데라모는 ‘침몰하는 독일(Sinking Germany)’이라는 글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30년 동안 추진해온 그랜드플랜이 깨졌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외교관 마르코 카르넬로스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최대 선물은 “중국의 유라시아 계획에서 독일을 끊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는 중단됐고 가스관은 물리적으로 파괴됐다. 지난해 10월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EU)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협력보다 경쟁이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신냉전이 펼쳐진다는 결론을 내기도 아직 성급하다. 지난해 4월 유엔 인권이사회의 표결에서 193개 회원국의 절반에 가까운 93개국이 러시아 퇴출에 찬성한 사실은 신냉전의 전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경제 제재에 참가한 국가는 93곳의 절반인 48곳에 불과했다. 친미와 반미로 명확히 양분되는 세계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이스라엘·멕시코·사우디아라비아·튀르키예 등 다수의 전통적인 미국 우방 국가들이 제재에 불참했다. 심지어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는 러시아산 석유를 구입하기 시작했고 튀르키예는 러시아 가스의 유럽 수출을 위한 가스 허브 노릇을 공식적으로 약속했다. 이스라엘과 멕시코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거부했다. 제재에 참여한 일본은 자국의 지분이 있는 사할린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이후 러시아와의 교역량을 오히려 늘렸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해를 넘겼을 즈음 독일도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을 방문했고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신냉전이 아니라 각자도생의 다극화 시대가 본격화하는 신호탄이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는 2012년 발표한 ‘글로벌 트렌드 2030’에서 2030년께면 어떤 나라도 패권을 독점하지 못하는 다극화 시대가 올 것으로 예견했고 이러한 기조를 2021년 발표된 ‘글로벌 트렌드 2040’에서 더욱 구체화했다. 미국발 다극화 시대는 이미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시대를 조율할 토머스 홉스식 ‘리바이어던(패권국)’이 사라지는 시대에 힘없는 국가의 운명을 조금 일찍, 그리고 살짝 보여줄 뿐이다. 앞으로는 훨씬 더 살벌한 다극화가 진행될 것이다.
다극화 시대에 우크라이나처럼 초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이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은 필살기다. 필살기는 기술 부문에서는 한국이 없으면 세계 경제가 무너지는 초격차 핵심 기술, 군사 부문에서는 치명상을 입지 않고는 한국을 침공할 수 없는 비대칭 전력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기술 부문 필살기였던 메모리반도체는 미국이 일본을 거쳐 다시 자국으로 회수할 태세다.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팅 시대를 받쳐주는 핵심 기술과 부품에서 비교우위를 보일 것을 찾아야 한다. 비대칭 전력에서 한국은 여러 사정으로 핵을 선택할 수 없다. 4차 산업혁명 기술에 기반한 미국의 3차 상쇄 전략(중국과 러시아의 군사력을 압도할 전략)의 핵심인 드론은 반도와 다도해 국가이자 정보기술(IT) 강국인 한국에 우선 고려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은 철저히 전문가 그룹에 맡겨야 할 것이다. 정쟁으로 실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정쟁이 치명적인 것은 낀 국가에 생존을 위한 정치안보적 결단이 고차방정식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한 우크라이나의 길을 갈 것인가, 모두를 선택하는 동시에 어느 한쪽도 선택하지 않는 싱가포르의 길을 갈 것인가. 수준 높은 정치가 관건이다.
이대식 태재아카데미 동북아협력실장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의 지경학 연구자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대통령 직속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전문위원, 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태재미래전략연구원에서 글로벌 패권 전쟁에 대응하기 위한 동아시아 지역 협력 솔루션을 연구하고 있다. ‘미국 패권의 진화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다수의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