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 말이 하나 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는 말이다. 자신이 속한 연령대·성별·조직 더 나아가 사회적 ‘계급’에 따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산다.
2021년 6월 광고계 종사자이자 웹툰 작가인 루나파크(홍인혜)가 ‘전세역전’이라는 연재작을 통해 자신이 속절없이 당한 전세 사기 피해를 고백한 적이 있다. 홍 작가는 그해 11월 연재를 끝내며 이렇게 말했다. “속이려고 작정한 사람을 상식적으로 대하다 뒤통수 맞은 피해자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
이듬해 봄이 찾아왔을 때 필자는 젊은 나이에 부동산 투자에 성공했다는 사람의 강연을 듣게 됐다. 그는 수도권 곳곳에 정비사업을 추진 중인 노후 빌라는 물론 산업단지 인근 다세대 주택도 여럿 갖고 있다고 했다. 성공담을 듣겠다며 모인 사람들 앞에서 강연자는 이렇게 말했다. “신축 빌라 세 줄 때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보험이 (공시지가의) 150%까지 나오는 거 아시죠. 그거 있으면 잔금 맞추려 애쓸 필요 없어요. 무자본 갭투자도 가능합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중소기업 근로자에게 나오는 전세대출도 최근 계속 한도가 늘고 있는데 이게 빌라하고 다세대 가격 올려준 일등 공신이에요. 우리(임대인)는 대출 오른 만큼 그대로 전셋값 높이면 됩니다.”
정부가 애초에 기대했던 정책금융의 효과는 이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급여가 적은 중소기업 청년 근로자들이 마음 편히 몸 누이도록, 신혼부부들이 일자리가 있는 수도권에 머물 수 있도록 선한 의도에서 정책의 한계를 조정했을 것이다. 공무원의 시선으로는 ‘서민 임차인’은 물론 ‘전문 투자자’의 시선을 간파하는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만들어낸 결과는 어떤가. 전세 사기를 당한 청년 임차인의 피해 규모는 5400억 원(2022년 기준)에 달한다. HUG는 대출 보증을 할 수 있는 한계(보증 배수)가 턱밑까지 다다랐고 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2015년 이전의 보증 배수인 70배로 조정하는 법안까지 발의된 상태다. 연내 수천억 원 규모의 정부 출자도 필요한 상황이다. 모쪼록 ‘정책 허점이 피해자를 양산했다’는 진부한 문장을 담은 기사를 또다시 작성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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