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가을이다.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린 SM엔터테인먼트의 아이돌인 NCT드림 콘서트에 갔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NCT드림의 노래는 한 곡도 모르고 멤버들의 이름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2시간여 동안 강렬했던 콘서트장의 열기는 감동이었다. 아이돌의 무대를 직관하고 나서야 K팝이 글로벌 시장의 주류로 떠오른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수만 명의 팬들은 무대 위의 그들과 ‘원팀’으로 보였다.
칼 군무에 칼같이 맞춰지는 현란한 응원봉 응원법이 모든 걸 이야기해준다. 오빠와 여동생뻘인 멤버들의 열정에 리스펙트하며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에 위로받는다. 과한 비용을 들여야 하는 ‘덕질’은 그들을 위한 구매가 아닌 우리를 위한 소비인 셈이다.
K팝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 데 이수만 전 SM엔터 총괄 프로듀서의 공이 컸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이제는 부질없는 얘기가 됐지만 그가 적당한 순간에 멈췄으면, 그래서 전설적인 프로듀서로, K팝의 역사로 남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큰 이유다. 괜찮은 타이밍은 수차례 있었다. 2010년 이 전 총괄이 SM엔터의 이사직을 내려놓았을 때가 첫 번째 기회였다. 2019년 국내 투자사들의 지배구조 개편 요구가 빗발쳤던 시기가 두 번째였다. 2021년 국세청으로부터 200억 원이 넘는 세금을 추징당하고 자신의 지분 매각을 고민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자신과 SM엔터를 동일시했던 그의 노욕은 이후 더욱 과해졌고 떠나야 할 시간도 놓치고 말았다.
최근에서야 밝혀진 이 전 총괄과 SM엔터 간의 계약을 보면 도대체 이곳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엔터기업인지, 사익에만 활용된 종교집단인지 헷갈릴 정도다. 지구상의 어떤 기업이 일종의 용역 계약이 끝난 후에도 70년간 수백억 원대의 로열티를 지급하는 사후 정산 약정을 맺을 수 있나. 들을 때마다 이상했던 그의 ‘나무심기’ 강연의 속내에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는 사실이 폭로됐을 때는 복잡했던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도 들었다.
가장 큰 피해와 상처는 SM엔터의 아티스트, 그리고 특히 그들의 동반자임을 자처하는 팬들의 몫이다. 최근 K팝은 특유의 세계관을 통해 글로벌 팬덤을 확보했다. 김동은 메타버스 제작사 대표는 “팬덤 자체가 하나의 세계”라며 “팬덤은 그 세계를 진짜로 받아들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SM제국’이 탐욕에 무너진다면 에스파의 ‘광야’를 떠받치고 있는 팬덤이 온전할 수 있을까. 지난주 말 열렸던 에스파의 콘서트에서는 1만여 명의 팬들이 ‘난 너의 편이 되고 싶어/ 힘들고 외로울 때 내 어깨를 내어줄게’라는 가사의 ‘포에버’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SM엔터를 사랑했던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이번 사태가 단지 대형 엔터 기업의 경영권 분쟁 매듭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 엔터 업계의 기형적인 지배구조와 폐쇄적인 내부거래가 정상화되고 투명해지는 계기로 작용해야 한다. 국내에 대중문화예술기획업체로 등록된 곳이 4000개(한국콘텐츠진흥원, 2022년 5월)가 넘는다.
이렇게 엔터 업계에 큰 숙제를 던져준 이 전 총괄, 그는 지금 어떨까. SM엔터의 한 직원은 블라인드를 통해 그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SM엔터의 역사를 함께한 임직원들의 피와 눈물, 그리고 허탈함을 4228억 원에 맞바꾸시고 지금 행복하십니까.” 정말 궁금하다. SM엔터는 잃었으나 거액을 챙긴 덕분에 행복할까.
그의 대답을 들을 길이 없어 대신 노래를 들어본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모든 것을/ 못 본 척 눈감으며 외면하고…’ 1983년 가수 이수만 시절에 부른 이 노래의 제목은 ‘행복’이다. 노랫말처럼 그는 못 본 척 외면해서 여전히 행복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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