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게 뭐야. 화상투약기? 엄청 큰 냉장고처럼 보이네.”
지난 4일 서울 한 대형 병원 앞을 지나가던 시민들이 A 약국 앞에 설치되는 기계를 보며 한마디씩 했다. 지난해 6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대한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제22차 신기술·서비스심의위원회에서 규제특례 승인을 받았던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원격 화상투약기)’다.
약사 출신인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가 2012년 개발한 화상판매기는 기계 전면에 모니터와 음성 송수신 장비가 장착돼 있다. 약국이 문을 닫은 늦은 밤이나 주말·공휴일에 환자가 모니터를 통해 증상을 말하면 약사가 원격으로 그에 맞는 약을 추천해준다. 24시간 냉장 보관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의사 처방전 없이 구매 가능한 일반의약품을 바로 살 수도 있다. 다만 의약품 오남용을 막기 위해 환자는 선택권이 없고 약사가 골라준 약만 구매할 수 있다. 안전성 확보 차원에서 약사와 환자 간 대화 내용을 6개월간 보관하고 카드로만 결제할 수 있도록 했다.
긴급 상황에 처한 환자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개발된 화상투약기는 약국이 아닌 장소에서 약사의 의약품 판매를 금지하는 현행 약사법에 10년 동안 발이 묶여 있었다. 약사 단체의 반발도 컸다. 2013년 인천 부평과 2021년 경기 용인 소재 약국 앞에 설치됐다가 지역약사회의 반발로 철거됐고 약사법 개정 시도도 불발됐다.
쓰리알코리아는 규제 샌드박스 특별법이 시행된 2019년 실증특례를 신청하고 3년이 지난 지난해 6월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심의위원회에 올랐다. 어렵게 조건부 승인이 결정됐지만 9개월이 지나도록 실제 운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는 정부의 현지 실사 일정이 지연되며 발목이 잡혔다. 과기부 외에도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의 실사가 필요한데 일정 조율이 쉽지 않다 보니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박 대표는 “당초 2월부터 실증특례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복지부와 현장 실사 일정 등으로 차질이 생겼다”며 “지난 주말 화상투약기 1대의 설치를 마쳤고 이번 주까지 실증특례에 참여하는 수도권 약국 10곳에 설치를 완료할 계획이다. 정부의 현장 실사 일정만 조율되면 이번 달 중순께 본격 운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쓰리알코리아는 지난해 9월 최신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한 화상투약기 15대를 생산하고 KC 인증을 받아 방진·방습·방온 실험까지 마쳤다. 규제샌드박스심의위는 지난해 승인 당시 화상투약기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일반의약품을 △해열·진통소염제 △진경제 △안과용제 △항히스타민제 △진해거담제 △정장제 △하제 △제산제 △진토제 △화농성 질환용제 △진통·진양·수렴·소염제 등 11개로 제한했다. 또 3개월 동안 약국 10곳에서 시범 운영한 후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화상투약기 설치와 유지·관리가 쉬운 수도권으로 한정해 10곳을 시범 운영하고 안전성 등의 문제가 없으면 전국적으로 1000대까지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쓰리알코리아는 올해 1월 사업설명회를 가진 후 화상투약기 설치 운영을 희망한 약국 중 서울과 경기, 인천 소재 약국 10곳을 1단계 사업 대상으로 확정했다. 10개 약국이 협의체를 꾸려 상담 약사를 공동 고용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하며 근무 약사 채용까지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합리한 규제를 과감히 혁신하기 위해 마련된 규제 샌드박스의 행정 절차가 상용화의 허들로 작용하게 됐다는 지적이다. 지역약사회도 화상투약기가 설치되면 주변 약국에 영향을 미칠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대한약사회는 화상판매기가 의약품 대면 판매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에 실증특례조차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실제 지난해 심의위 안건 상정을 하루 앞두고 전국 약사 1000여 명은 ‘약 자판기 저지 약사궐기대회’를 열었다. 과거 화상투약기를 설치하고도 지역약사회의 반대로 철거됐던 선례가 있는 만큼 참여 약국들의 속앓이도 깊어지는 실정이다. 쓰리알코리아는 공식 운영까지 화상투약기 설치 약국의 명단과 위치 공개를 꺼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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