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쟁 시대에는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자율과 협력에 바탕을 둔 안정적 노사관계도 중요하다. 현대 노동조합의 기본 역할은 작업현장 근로자들과 경영진 사이에서 노사 소통을 원활히 하고, 근로자 민원을 해결하며, 작업현장 효율화를 통해 생산성을 제고하는데 협력하는 것이다. 이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면 생산성이 제고된 만큼 임금도 충분히 인상될 수 있고, 고용도 확대되며, 파업과 시위도 그만큼 불필요해진다. 그러기에 현재 우리 노사가 협력보다 대립과 갈등에, 자율보다 상급 노총 주도의 대정부 투쟁에 힘을 쏟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돌이켜 보면 우리 노사도 협력적인 시절이 있었다. 1998년 경제위기 당시 우리 노사는 생사의 기로에 선 공동 운명체였고, 상생을 위해 자율적으로 양보하고 협력함으로써 1년 남짓한 기간에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25년이 지난 지금 상생과 협력은 간 데 없고 갈등과 투쟁만 남은 것은 노사관계에 대한 정치권의 잘못된 개입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노사관계의 핵심은 ‘자율과 책임’을 바탕으로 한 동반자 관계며, 정부의 올바른 역할은 그 동반자 관계가 협력적으로 잘 유지될 수 있도록 균형 잡힌 법과 규칙을 제정하고 엄정하게 집행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바로 정치적 중립성이다. 자율적이어야 할 노사관계에 정치권이 개입하거나 법치의 중립성이 훼손되면 노사 모두 자율적 노력보다는 정부와 정치권과의 관계에 더 의존하는 소위 마약효과(narcotic effect)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표를 위해 노사를 갈라치고 정파적 갈등을 조장하는 후진성까지 보이면 노사관계는 순식간에 정치화돼 갈등이 격화되고, 자율과 협력이 설 자리는 사라지며, 대정부 투쟁만 남게 된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마거릿 대처 수상이 개혁의 칼을 빼기까지 영국 공공부문의 노사관계가 바로 그랬다.
1998년 당시 한시적으로 도입돼 사회적 대타협 도출에 크게 기여했던 노사정위원회가 오히려 노사 정치화의 촉매가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위원회가 상설기구로 전환되면서 노조는 정부의 많은 사회정책을 심의·의결하는 주체가 됐고, 그만큼 정치권과의 연합도 쉬어지고, 대정부 투쟁의 효과성도 높아졌다.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기득권을 보호하고 새로운 이득을 얻을 여지는 늘어났고, 그만큼 생산성이나 자율·협력을 위해 노력할 필요성과 유인은 약해졌다. 생산성 제고가 없으면 제로섬 게임에 불과하고, 결국 그렇게 얻은 이득은 남의 것을 빼앗아 온 이득일 뿐이다. 그 남이 바로 건설현장에서 밀려난 근로자들, 중소 영세 하청업체, 실업자들이다. 정치 권력화 된 집행부가 대정부 투쟁이라는 편법에 빠져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기득권을 보호하려 할수록 대기업, 공공부문, 금융?통신 등 규제산업 거대 노조의 기득권은 보호될지 모르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중소업체 근로자들의 생존이 위협받고 구직자를 위한 일자리는 줄어드는 양극화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쟁 시대에 임금이 지속적으로 인상되고 근로복지가 개선될 수 있으려면 생산성 향상 외에는 대안이 없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불멸의 경제 원리이기 때문이다. 생산성은 노사가 같이 노력하고 협력해야 향상될 수 있다. 자율적 협력관계를 정착시키려면 정치권은 발을 빼고, 정부는 중립적 심판 역할만 해야 한다. 경제위기 동안 노사가 자율적으로 협력했던 것도 당시 정치권에 기대 얻을 수 있는 실익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사 누구도 정치화와 무분별한 대정부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하며, 노사가 스스로 책임지는 자율적 합의 외에는 대안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노사는 공동 운명체로 거듭날 수 있고, 그런 공동 운명체일 때 비로소 상생을 위한 협력에도 가속이 붙는다. 지금 불법 파업에 면책권을 제공하는 노란봉투법은 이런 시대적 요구를 외면한 시대착오적인 발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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