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서 ‘제5의 메이저’ 대회로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매년 미국 플로리다주 폰테베드라비치의 소그래스 TPC 스타디움 코스에서 열린다. 아일랜드 그린으로 유명한 17번 홀(파3)이 소그래스 TPC의 상징이다. 잔잔한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홀이 매혹적이다.
이 홀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건 홀의 동선이다. 직전인 16번 홀(파5)에서 그린에 볼을 올린 뒤 걸어오다 보면 그때부터 우측의 커다란 연못과 매끈한 그린이 시야를 사로잡는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 또 다른 작은 섬도 눈에 들어온다. 이때부터 골퍼들의 신경은 온통 17번 홀에 쏠린다. 앞 팀 멤버들이 티샷을 그린에 볼을 올리는지, 퍼팅은 어떻게 하는지를 살핀다. 전 홀에서부터 기대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17번 홀은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파3 홀로 꼽힌다. 137야드에 불과해 프로 골퍼라면 피칭 웨지로 공략할 수 있고,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도 거리 부담이 없는데 왜 그럴까. 연못 위로 부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가 시시때때로 달라지고 물이 주는 긴장감이 크기 때문이다.
관람석이 콜로세움처럼 홀을 빙 둘러싸고 있어 대회 때는 갤러리들의 환호성과 시선이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이곳을 설계한 피트 다이는 아내인 앨리스와 라운드를 하다가 17번 홀 그린에 볼을 올린 뒤 “왜 선수들이 이 홀을 어렵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딴 나라 얘기하듯 한 적이 있다. 그러자 앨리스는 “그건 구경꾼이 나와 개구리 정도만 있을 때의 얘기”라며 면박을 줬다.
17번 홀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다. 벙커는 기본적으로 골퍼에게 가혹한 시련을 주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볼이 코스 밖으로 나가는 걸 막아주는 기능도 한다. 17번 홀 그린에는 우표딱지만한 작은 벙커가 앞쪽에 하나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러프도 사실상 없어 볼이 그린 뒤쪽에 떨어지면 그대로 굴러 물에 빠지기 일쑤다.
1년 동안 17번 홀에 빠지는 볼은 대략 10만 개로 추산하고 있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나흘 동안에는 평균 47개의 볼이 물속으로 사라진다. 한 라운드에 가장 많은 볼이 빠진 건 2007년 1라운드의 50개다. 밥 트웨이는 2005년 이 홀에서만 12타를 기록했다. 2021년 1라운드 때 안병훈은 11타를 쳤다.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41차례 대회를 치르는 동안 홀인원은 고작 9개밖에 나오지 않았다.
피트 다이는 어렵고 도전적인 코스 설계로 악명이 높아 선수들 사이에 ‘사드 후작’으로 불렸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이곳에서 처음 개최됐을 때도 선수들의 불만이 코스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세계 최정상 골퍼들을 쩔쩔매게 하는 17번 홀을 만든 건 사실 그의 아내인 앨리스였다.
피트 다이는 습지에 코스를 만들면서 17번 홀 주변 모래를 엄청나게 파내는 바람에 정작 이 홀을 어떤 식으로 조성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때 아내인 앨리스가 “그럼 아일랜드 그린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앨리스가 소그래스 TPC 근처에 있던 폰테베드라 인앤드클럽의 오션 코스에서 라운드를 한 적이 있는데 그곳의 9번 홀이 아일랜드 그린이었다. 앨리스는 그 홀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그래스 TPC의 아일랜드 그린은 PGA 웨스트 스타디움 코스 17번 홀, 국내에서는 충남 천안 우정힐스 13번 홀 등 수많은 아류를 남겼다. 하나같이 골퍼들을 쩔쩔매게 한다.
앨리스는 남편과 함께 소그래스 TPC 외에 하버타운 골프링크스, 키아와아일랜드 오션 코스, PGA 웨스트 등을 협업해 만들었다. 여성 최초로 미국코스설계가협회(ASGCA) 회장을 역임하는 등 코스 설계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렸다. 여성 골퍼를 위한 레이디 티를 처음 고안한 것도 앨리스다.
올해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10일부터 나흘간 열린다. 세계랭킹 1∼3위인 욘 람, 스코티 셰플러 로리 매킬로이가 모두 출전한다. 한국 선수 중에서는 2017년 이 대회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운 김시우를 비롯해 임성재, 김주형, 이경훈, 안병훈, 김성현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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