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히어라는 이사라 역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하지만, 시청자들은 김히어라 아닌 이사라를 상상할 수 없게 됐다. 눈빛부터 외형, 말투까지 캐릭터 그 자체다.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닌, 10년 이상 무대 위에서 갈고닦은 노력의 산물이다.
뮤지컬 배우로 데뷔한 김히어라가 대중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연출 안길호)부터다. ‘더 글로리’는 유년 시절 당한 학교 폭력으로 인해 인생이 부서진 여자, 문동은(송혜교)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가해자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는 이야기. 김히어라는 문동은을 괴롭힌 학폭 가해자 중 한 명인 이사라를 연기했다.
이사라는 모순적인 인물이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죄의식 없이 학폭을 저지르고, 술과 마약에 빠져 산다. 외부적으로는 고상한 화가, 실상은 잘못된 신앙으로 제멋대로 사는 망나니다.
“이사라와 내가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한 건 많은 정보가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대본이 유출되면 안 되니까 오디션 30분 전에 나눠줬거든요. 문동은, 이사라, 박연진(임지연), 그리고 잠깐 나오는 여자 캐릭터들이 담긴 한 장면이었어요. 그땐 누가 주인공인지 몰랐어요.”
찰나의 장면만 담긴 대본 속 이사라의 첫인상은 러블리했다. 최혜정(차주영)과 함께 손명오(김건우)의 집에서 여권을 찾는 신에서 이사라의 말투가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 오히려 박연진이 후배 기상캐스터에게 ‘넌 언제까지 어릴 것 같니?’라고 비아냥거리는 대사가 입에 붙었다. 하지만 두 번째 오디션에서 이사라 역을 제안받았다.
“최종 오디션 30분 전에 이사라 대본을 모아서 주셨어요. 이사라에 대한 정보가 투입이 되면서 나와 맞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나른한 부분이라든지 위트 있는 말, 티키타카 같은 것들을 재밌게 살리면 좋겠다 싶어서 욕심냈어요.”
“작가님과 감독님이 칭찬으로 말씀해 주신 건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너의 눈빛과 눈이 우리가 생각한 이사라와 비슷하다. 강렬해서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식 대본을 받고 우리 스태프들이 와서 축하해 줬어요. 눈물이 찔끔 났어요. 정말 영화 같고 제가 기다렸던 순간인 것 같았죠. 그동안 공연 생활을 하면서 무명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대중적이지 않다 보니 매번 저를 걱정했을 테니까요. 매체에 와서 대단한 작가님, 감독님이 나를 택하고 축하받는데 그동안의 10년이 보상받는 느낌이었어요.”(웃음)
김은숙 작가와 안길호 감독의 눈은 옳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림 전시회까지 연 김히어라와 화가 설정인 이사라는 싱크로율이 높았다. 김히어라는 “두 번째 오디션에서 감독님과 제작진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느낌을 받고 일어나려는데 엉덩이가 무겁더라. ‘내가 부족한 게 없었을까’ 하다가 뒤돌아서 ‘내가 마침 전시회 중이다. 그림을 좀 그린다’고 했다”며 “나의 그림체가 내가 생각하는 사라와 같은 부분이 있다고 하니, ‘앉아봐. 그림 좀 보여줄 수 있을까’라고 하더라”고 비하인드를 밝혔다.
이날 취재진들에게 보여준 김히어라의 작품은 그의 말처럼 이사라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 있었다. 진한 화장과 액세서리로 한껏 치장했지만, 담배와 술로 헛헛한 마음을 채우는 불안함이 묻어있다. 이를 계기로 김히어라는 극 중 이사라의 그림도 직접 작업했고, 아쉽게도 현장 분위기와 맞지 않아 불발됐다. 대신 드로잉이 돼있는 곳에 김히어라가 덧칠하는 방식으로 결과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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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이나 학폭은 해본 적 없는 부분이라 부담을 갖고 연기했다. 작은 것들이 모여 누군가에게 영향이 갈 수 있는 부분이라,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정당화시켜서도 안 되고, 과장할 수도 없었다. 가상의 작품 속 이사라를 그리는 것에만 집중했다.
“또렷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걸 표현할 때도 있었고, 환각이 보일 때는 근육 하나하나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걸어가는 것도 투박하지 않게 하려 했어요. 지문에 나와 있지 않은 부부인었죠. 각도나 시선도 연구했고 평소에는 나른한 상태에 지쳐있는 것에 신경 썼어요. 중독된 사람들은 뇌가 굳어가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리액션도 느리게 하려고 했고요. 가면 갈수록 말에 버퍼링을 줬죠. ‘뭐냐. 단어 뭐냐' 이런 식으로요.”
“점점 갈수록 메이크업도 없애고 다크서클만 있다 보니까 과하게 표정 짓지 않아도 (마약 중독자처럼)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제 모습을 보고 ‘내가 이렇게 생기기도 했구나’ 싶었죠. 새로운 각도에서 저의 모습을 보게 됐어요.”
교회에서 마약을 하는 신과 손명오의 장례식장에서 연필로 최혜정의 목을 찌르는 신은 명장면이다. 김히어라는 자극적이고 어려운 신일 수록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그는 “환각 신은 거의 한두 테이크 만에 찍었다”며 “감독님은 오히려 나에게 가볍게 ‘이 정도만 해’라고 했지만, 내가 아쉬워서 ‘더 해봐도 되냐’고 했다”고 열정을 보였다.
찰떡같은 소화력이지만 김히어라를 오래전부터 아는 사람들이라면 낯설 수 있다. 2009년 뮤지컬 ‘살인마 잭’으로 데뷔한 그는 지난 2021년 드라마 ‘배드 앤 크레이지’부터 매체로 무대를 옮겼다. 이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탈북자 계향심 역, ‘진검승부’ 태실장 역 등 인상 깊은 캐릭터를를 연기했다.
“예전에 방송에 나왔을 때 제 친구들은 ‘히어라가 저런 걸 하네?’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작품에 확 빠져서 봤다고 했어요. 퇴폐적인 매력이 있는지 몰랐다고도 하고요. 뮤지컬 공연에서는 주로 정의롭고 능동적인 역할을 많이 맡아서 이런 연기를 할 줄 몰랐다고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이름도 특이하고 저도 언니도 피부가 하얗고 갈색 눈이에요. 혼혈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요. 안 좋은 게 아닌데 어린 마음에는 싫었거든요. 그런데 역할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공연은 눈동자까지 보이지 않는데 매체에서는 눈 덕분에 매력적인 작품을 맡게 되지 않았을까 싶었죠. 관계자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어요.”
대선배인 송혜교 덕분에 지난날의 시간을 뿌듯하게 느끼기도 했다. 송혜교의 오랜 팬이었다는 그는 대본 리딩 이후 처음으로 사담을 나누며 팬심을 고백했다. 반대로 송혜교는 그에게 ‘공연하는 동료들에게 잘한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내가 더 많이 준비해야겠다’고 용기를 북돋아 줬다고.
“혜교 언니는 저보고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기대된다. 마음껏 해라’라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줬어요. 감동적이었죠. 그 이후로 고민하고 있는 뮤지컬 배우 친구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걸 다 아나 봐. 혜교 언니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라. 헛된 게 아닌 것 같다. 잘 살자.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게 됐어요.”
‘더 글로리’는 불안함을 자신감으로 바뀌게 했다. tv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2’ 촬영 중인 그는 “이사라와 겹치는 건 전혀 걱정이 안 된다”고 단언했다.
“‘더 글로리’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영광스러운 필모그래피예요. 이렇게 많은 분들과 인터뷰할 거라는 건 지난해에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촬영할 때 잘 될 건 알아도 그 영향이 저한테까지 올 줄 몰랐어요. 제가 조금 더 매체에서 좋은 연기를 하는 과정이 되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잊지 못할 거 같아요. 이런 순간이 또 오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겨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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