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북한이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를 연 데 이어 두 달도 안 돼 식량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전원회의를 1주일간 개최했다. 대표들이 모여 상부의 지시 사항을 받아 적는 회의가 일상의 일이니 매주 전원회의를 해도 사실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농업이 단일 안건인 것은 이례적이다. 평양 권부는 잘산다는 개성까지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을 방치할 경우 대규모 기근이 북한 전역을 덮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김정은 총비서는 회의에서 “농촌의 정치·사상적, 물질·기술적 토대를 실제적으로 강화하기 위해서는 농업 발전에 부정적 작용을 하는 내적 요인들을 제때 찾아내 해소하는 것이 절실한 요구”라고 강조했다. 북한 언론 보도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가늠이 잘 안 돼 후반부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상부의 지시 사항이 소개됐다. 김 총비서가 제시한 ‘농업 발전 목표와 과업’은 관개 체계의 완비, 농기계 생산 확대, 간석지 개간과 경지면적 확대, 농업기술 개발 등이다.
유감스럽게도 김정은이 제시한 해법은 식량 문제 해결의 필요조건은 될지 몰라도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우선 저수지 관리를 잘해서 관개 체계를 개선하는 것은 기본이다. 트랙터 등 농기계 생산도 당연히 필요하다. 경지 면적을 확대하고 첨단 농업기술을 연구하는 것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런 대책은 1948년 북한 정권 창설 이래 농업 당국이 추진해왔고 매년 강조됐다. 김정은의 지시는 재탕 삼탕의 대책이다.
북한의 식량 위기는 아랫집과 윗집의 경험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해법이다. 아랫집은 우리나라의 경험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을 모방하면 된다. 우선 비료 증산이다. 박 전 대통령은 화학비료 1톤을 논에 살포하면 1.2톤의 쌀이 증산되는 농학적 지식을 토대로 1960년대 중반부터 각 도에 비료 공장을 건설했다. 다수확품종인 통일벼를 개발했고 1개 면에 최소 1~2개의 저수지를 건설했다. 일본산 이양기 및 탈곡기 등을 벤치마킹하는 농업 기계화도 적극 추진했다.
윗집은 중국의 개혁·개방 경험이다. 1950년대 중반 마오쩌둥의 인민공사를 통한 집단 영농은 3000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시켰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1978년 개혁을 선언한 덩샤오핑은 농민들이 선택한 개별영농제도를 묵인했다. 개별영농제도는 공동 생산, 공동 분배라는 기존 방식 대신 농민이 개별적으로 토지를 분배받아 경작한 뒤 수확의 일부를 국가에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하도록 한 것이다. 농민들의 영농 의욕을 자극해 식량 부족 사태가 단계적으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한중 양국의 식량 부족 해결 사례에서 핵심은 농민들의 영농 의욕을 높이면서 일반 경제에 연계된 농자재 산업을 육성하는 대책이었다. 1970년대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운동과 덩샤오핑의 인센티브 농정은 농민들이 신바람 나게 농사짓는 풍토를 조성했다.
농민들의 동기 부여가 없는 획일적인 협동 농장 시스템과 핵과 미사일에 집중하는 군수 경제는 먹는 문제 해결과는 번지수가 맞지 않는다. 본질을 해결하지 않고 사상 무장을 강조하며 최고 지도자의 지시 사항을 맹목적으로 받아쓰는 식의 전원회의로는 절대 식량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한중의 개혁적인 대책이 체제 유지에 부정적이라 수용하기 어렵다면 미사일 발사 비용으로 쌀을 수입하면 된다. 그러면 인민을 굶기지 않을 수 있다. 지난해 71발의 미사일 발사에는 2억 달러(약 2600억 원)가 소요됐는데 그 비용이면 50만 톤의 식량을 수입할 수 있다. 식량 부족의 절반 이상을 보충할 수 있다.
김정은은 자동차와 스마트폰을 팔아 자급률이 1% 수준인 밀을 대량 수입하는 대한민국의 무역구조를 배워야 한다. 김정은이 어린 딸과 미사일 발사장만 방문해서는 알곡 생산이 늘어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정책이 변하지 않으면 4대 세습을 해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더 이상 사이비 농정으로 인민들을 기만하고 굶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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