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중국·일본·러시아. 오늘날 한국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4개국이다. 놀랍게도 개항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해 달라진 국제적 환경에 대응해야 했던 140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이 4개국이 가장 중요하게 대두됐다.
1880년 3월 23일 수신사에 임명된 예조참의 김홍집은 그해 8월 2일 일본에 가 청나라 공사관의 참찬관이었던 황준헌을 만난다. 김홍집이 황준헌에게서 전수받은 ‘조선책략’에는 4개국에 대한 ‘책략’이 담겨 있었다.
조선책략에 따르면 한중일 삼국에 가장 두려운 나라는 러시아다. 반대로 미국은 가장 미화돼 있다. 따라서 조선은 자강(自强)을 도모하기 위해 러시아에 대항하는 한편 황준헌의 조국인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는 동시에 일본과 맹약을 맺으며 미국과 연대하면 좋겠다는 조언이 담겨 있다. 이른바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이다. 김홍집은 이 책을 고종에게 헌상했고 조선 말기 대외 관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에 체류하던 중국의 외교관, 그것도 계속된 서구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역부족을 느끼던 청나라의 한족 관리가 조선에 던진 조언이라는 맥락에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지금 시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중국 외교관이 개항한 조선에 대해서 미국과 연대하면 좋겠다는 조언이다. 고종은 중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이 권유했던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1882년 제물포에서 맺었다.
물론 14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조언을 공개적으로 제시할 중국 외교관은 없을 것이다. 그동안 국제 정세는 크게 몇 번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의 외교적 경관은 여전히 4개국에 집중된 국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구호는 이렇게 바뀐 듯하다. “결미국, 친일본, 연중국.” 미국과 결속하고 일본과 친교하며 중국과 연대하라. 단 대한민국의 자강을 위해.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