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현지 시간)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최근의 금융 불안 사태를 언급했다. 그는 “은행 시스템은 건전하며 강력한 자본력과 유동성으로 회복 역량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금리 인상이 시작된 지난해 3월 이후 그가 거의 빠짐없이 인플레이션 이야기로 기자회견을 시작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연준이 이번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인플레이션과 금융 안정이라는 딜레마를 두고 고민이 깊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연준의 선택은 일단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지속하는 쪽이었다. 연준은 이날 기준금리를 4.75~5.0%로 0.25%포인트 인상했다. 지난해 3월 이후 9차례 연속 금리 인상이다. 새로운 기준금리는 2007년 6~9월(5.25%) 이후 15년 만에 가장 높다. 파월 의장은 “금융 불안에 따른 불확실성을 감안해 금리 인상 동결도 고려했지만 물가와 고용지표가 예상보다 강했다”며 인상 배경을 설명했다.
시장이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최종금리였다. 투자자들은 금융 불안이 불거진 후 올해 말 금리가 4% 중반 수준까지 떨어질 것으로 봤지만 연준은 새로운 점도표에서 올 연말 금리 전망으로 5.1%를 제시했다. 지난해 12월 전망과 같다. 파월 의장은 “우리는 올해 경제 성장이 다소 둔화되고 인플레이션이 천천히 감소하는 동시에 노동시장의 수급은 계속 재조정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이에 올해 금리 인하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연내 피벗(Pivot·통화정책 방향 전환) 가능성에 선을 그은 것이다.
다만 금리 인상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점은 명확해졌다. 이번 인상을 포함하면 연준이 제시한 최종금리 범위(5.0~5.25%)까지는 0.25%포인트가 남았기 때문이다. 연준의 전망대로라면 사실상 다음 회의인 5월 FOMC에서 한 번의 베이비스텝(0.25%포인트 금리 인상)을 끝으로 1년에 걸친 금리 인상 행보가 막을 내리게 된다.
경제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크다. 파월 의장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경제 상황에 따라 최종금리 등 통화정책이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굉장히 많은 위원들이 이야기한 부분은 바로 가계와 기업에 대한 신용 위축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라며 “이는 우리가 하고 있는 (금리 인상) 정책과 동일한 효과를 내거나 그 이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대로 “만약 신용 시장 위축에 따른 금리 인상 효과가 적다면 실제 기준금리를 더 올려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상 신용 시장 추이가 인플레이션이나 고용과 함께 통화정책의 핵심 요인이 됐다는 의미다.
시장은 신용 경색이 심해질 가능성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마켓워치에 따르면 이날 미국 10년물 수익률은 16bp(1bp=0.01%포인트) 하락했으며 기준금리 전망에 민감한 2년물 수익률도 23bp 떨어졌다. 여기에는 이날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의회에서 “예금을 전액 보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한 발언도 영향을 미쳤다. 은행 불안이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에 안전자산인 국채 수요가 커진 데다 피벗이 없을 경우 경제가 둔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겹쳤다.
파월 의장 역시 연착륙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든 모습이다. 그는 연착륙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길은 아직 열려 있다고 본다”면서도 “(SVB 사태에 따른) 불확실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경기 둔화 확률은 높아진다”고 답했다. 그는 지난달 FOMC에서는 “연착륙이 기본 시나리오”라고 답한 바 있다.
한편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역시 이날 금융 불안보다 인플레이션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날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석해 “인플레이션은 여전히 높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며 “수요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금리를 충분히 제약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레디트스위스(CS)발 금융 혼란의 진원지였던 스위스도 미국 금리 인상 다음 날인 23일 기준금리를 1%에서 1.5%로 0.5%포인트 인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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