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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만원짜리 金 훔쳐도 실형 사는데"…수백억 기술도둑엔 '관대한 法'

[구멍난 법망에 핵심기술 샌다]

<하> 엄벌만이 탈취 막는 지름길

최고형 상향 4년 됐지만 양형 그대로

檢 15년 구형에도 선고는 고작 4년형

대부분 집유…강도·사기보다 낮아

기술 가치 설명할 기회 보장하고

실제 피해액 산정 전문기관도 필요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는 지난해 5월 전 세메스 연구원 A 씨를 재판에 넘겼다. ‘초임계 세정 장비’ 제조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혐의다. 이는 초임계(액체와 기체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 이산화탄소로 반도체 기판을 세정하는 기술이다. 검찰은 세메스 측이 2018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반도체 세정 장비 기술을 국외로 유출했다며 징역 15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1심에서 “반도체 세정 장비를 제작해 판매하려는 계획하에 조직적으로 피해 회사의 기술 자료를 부정 취득·사용하고 제작된 세정 장비를 중국 업체에 수출했을 뿐 아니라 기술을 이전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 회사, 피해 규모를 지금 당장 명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없더라도 손해를 가벼운 것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질책했으나 결국 A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이는 검찰 구형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검찰 구형과 실제 재판부 선고에 큰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법·제도를 꼽는다.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산업기술보호법),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부정경쟁방지법)이 2019년 개정돼 법정형이 한 단계 올라갔으나 영업비밀 침해 행위에 대한 양형 기준은 6년째 그대로다. 게다가 형사재판 절차상 피해자(기업)에 대해서는 증인 심문만 있을 뿐 기술의 가치 등을 제대로 설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또 재판부에 처벌 수위를 가릴 기술 가치, 침해 정도 등을 산출할 자문단조차 없어 산업기술 ‘보호 법망’을 한층 촘촘하게 하기 위한 법·제도적 변화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23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21~2022년 산업기술보호법·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9건의 사건 가운데 8건은 법원 1심 선고가 검찰 구형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징역 5년을 구형해도 결과적으로는 징역 1~2년이 선고돼 처벌 수위가 낮아졌다. 또 9건 중 6건은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실제 처벌 수위가 구형 수준과 비슷한 경우는 단 1건뿐이었다. 그나마도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했으나 실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산업기술 유출이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나 유출로 기업이 보게 될 피해 등을 고려해 검찰이 평균 징역 4년 6개월을 구형했으나 실제 처벌 수위는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모습이다.

검찰 관계자는 “산업기술 유출 사범들은 재판에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등 답변을 회피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증거인멸 정황마저 포착되고 있다”며 “구형 때 죄질이 좋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 처벌 수준은 미미한 게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술 유출도 결국 절도죄에 해당한다”며 “500만 원짜리 금을 훔쳐도 징역형이 선고되는데 산업기술 유출 사건은 그렇지 못하다”고 덧붙였다. 산업기술 유출과 절도는 유무형의 차이가 있을 뿐 무언가를 훔쳐 빼돌리기는 매한가지이나 처벌 수위는 천지 차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일반·특수강도의 경우 양형 기준은 최고 6년, 8년에 달한다. 사기에 대한 양형 기준도 피해액이 50억~300억 원, 300억 원 이상일 때 각각 9년, 13년이 최고 형량이나 영업비밀 침해 행위는 국내외가 각각 4년, 6년 수준에 그치고 있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지식재산 범죄 양형 기준 내에는 영업비밀 침해 행위와 함께 디자인·상표 등을 도용하는 저작권 침해 행위도 포함돼 있다”며 “상표권과 관련된 범죄는 처벌 수위가 낮아 지식재산 범죄 자체 형량이 원래 낮게 나오는 듯한 착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만큼 영업비밀 침해 행위를 따로 분리해 양형 기준을 정하는 논의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여기에 형사재판 절차상 피해자(기업)에게 기술 가치 등을 설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현재 피해자는 증인 심문만 있을 뿐 기술 가치 등을 설명하거나 의견서를 제출할 수 없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 과정에서 기술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가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가 스스로 설명할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정창원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는 “피해자에 대해서는 증인 심문만 있을 뿐 기술의 가치나 중요성을 설명할 기회조차 형사소송법상 보장되지 않고 있다”며 “선고와 관련된 사실 외에 영업비밀이나 산업기술 판단 기준인 경제적 유용성과 관련해서는 의견서조차 제출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재승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재판 과정에서 기술 침해액을 산정하기 위한 전문 기관이나 감정관 등을 둬 실제 피해 액수를 정확히 산정하는 실무적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수원지검 방위사업·산업기술범죄형사부의 경우 특허청에서 파견된 산업기술 수사 자문관 2명이 근무 중이나 특허법원을 제외한 각 지방법원 재판부에는 자문 등을 담당하는 인력이나 부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산업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형사 외에 민사사건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에도 차츰 힘이 실린다. 처벌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기업)가 실질적 보상까지 받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증거 수집이 가능한 한국형 디스커버리 제도가 조속히 시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유출 경위를 밝히거나 피해 금액이 얼마인지 정확히 산정하기 위해서는 가해자(기업)가 보유한 각종 자료가 필요하지만 피해자(기업)가 접근할 방법은 전무하다”며 “미국 등 선진국에서 대부분 도입하고 있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지 못하다 보니 앞서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의 기술 분쟁 소송도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변호사도 “디스커버리 제도는 한층 광범위한 증거 개시(수집)가 가능하다”며 “이는 피해 금액의 산정이나 증거 수집에 있어 민사사건상 피해자 손실 회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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