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이 불안에 휩싸였다. 시게이트은행·시그니처은행 등 중소형 은행들이 연쇄 도산하고 크레디트스위스와 도이체방크까지 흔들리면서 2008년 금융위기의 악몽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983년 10월 설립된 SVB는 자산 규모 2218억 달러로 미국 16대 은행이다. 스타트업의 65%가 SVB를 주거래 은행으로 할 만큼 스타트업 중심의 기술 기업 고객 기반을 갖고 있다. 지난해 SVB 자산의 60%는 국채였고 40%가 대출 자산이었다.
SVB 사태의 본질은 두 가지다. 첫째, SVB의 90% 가까운 예금이 벤처캐피털·스타트업 및 고액 자산가의 기업 운영 자금용 당좌예금이었다는 점이다. 이들 당좌예금은 기본적으로 수시로 입출되는 유동성이 매우 높은 자금이다. 이런 자금을 기반으로 한 장기적 자산 운용, 즉 장기 대출 혹은 장기 국채 운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둘째, 자산의 60%를 장기 미국 정부채에 투자했다는 점이다. 금리가 급상승한 지난 1년 동안 미국 국채 가격이 약 20% 가까이 하락하면서 채권 투자 손실만 200억 달러 이상 발생해 자본 잠식 상태에 도달했다. 이 사실이 3월 8일 알려지면서 하루 뒤 450억 달러, 이틀 뒤 1100억 달러의 대규모 인출 사태(뱅크런)가 일어났다. 결국 SVB의 몰락 원인을 정리하면 초단기 예금에 의존하면서 과도한 장기 국채 투자에 몰두한 결과 엄청난 손실을 입고 파산한 전형적인 리스크 관리 실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SVB 사태는 2008년의 금융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번 사태는 고립되고 독립적인 사건이다. 금융위기는 모기지은행·투자은행·기관투자가가 서로 연결되면서 위기가 고리처럼 확산됐지만 이번 사태는 연쇄 고리가 없다. 예금주들이 대부분 이미 피해를 보기 전에 인출해 나갔고 미처 인출하지 못한 일부 고액 예금주나 일반 고객의 예금은 전액 보장됐기 때문에 피해가 연쇄적으로 퍼져나갈 고리가 없다.
국채 가격의 하락에 따른 전체 금융기관의 자산 피해 규모도 크지 않다. 2월 말 현재 미국 국채의 발행 잔액은 약 31조 달러로 이 가운데 약 5조 5000억 달러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1조 3000억 달러는 여타 정부 기관이 각각 보유하고 있다. 민간이 갖고 있는 국채는 24조 3000억 달러 정도다. 이 중 약 8조 달러는 외국 중앙은행 몫이므로 민간 금융기관이 보유한 국채는 16조 달러 내외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연금·저축기관이나 외국 금융기관들이 갖고 있어 미국의 민간 금융기관 몫은 10조 달러 이하일 것이다. 따라서 국채 가격이 20% 내외로 하락할 경우 국채를 보유한 민간 금융기관의 자산 손실은 2조 달러에도 못 미칠 것이고 이로 인한 대규모 연쇄 부도 혹은 뱅크런의 가능성은 낮다.
연준은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는 거의 무제한적인 유동성을 공급할 의지가 확고하다. 위기에 무딘 것은 문제지만 과도하게 예민한 것은 더 나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