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영화 ‘길복순’(감독 변성현)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 넷플릭스 측에 따르면 ‘길복순’은 공개 3일 만에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 영화(비영어)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길복순’은 청부 살인 업계 최고 실력을 가진 전설의 킬러이자 중학생 딸을 키우는 싱글맘 길복순(전도연)이 회사와의 재계약을 앞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길복순’은 배우 전도연의 첫 액션 작품이자 원톱 킬러물이라는 것만으로도 공개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킬러이자 엄마, 왠지 모르게 기시감이 들 것이다. 한국 영화에서 중년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 지겹도록 등장하는 설정이 ‘엄마’와 ‘모성애’이기 때문이다.
여성 킬러물은 반갑지만… 기승전 '모성애'는 아쉽다
여성 원톱 킬러 영화는 이전에도 존재했다. 영화 ‘악녀’(감독 정병길), ‘미옥’(감독 이안규), ‘정이’(감독 연상호)가 대표적이다.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액션, 누아르 장르에서 여성 주인공의 등장은 가뭄 속 단비 같았다. 그러나 세 영화 모두 여성 액션을 내세우며 본질적으로는 모성애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지닌다.
‘악녀’의 숙희(김옥빈)은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인물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70명의 조직원을 때려눕힐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숙희지만, 사랑하는 연인과 자식 앞에서 한없이 약해진다. 범죄 조직 이인자인 미옥(김혜수)은 상훈(이선균)에게 끊임없이 휘둘리며 자신의 아들을 위해 모든 걸 건다. 정이(김현주)는 아픈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모성애를 발휘하여 희생하는 어머니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성 캐릭터를 설정할 때 모성애를 포함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모성애가 캐릭터를 구성하는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이야기 속 주인공은 어떠한 계기 또는 동기로 인해 움직인다. 보통 한국 영화에서 중년 여성 캐릭터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앞선 영화들처럼 모성애다.
길복순을 움직이는 건 모성애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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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설정을 가지고 있는 ‘길복순’은 모성애를 다루는 방식이 사뭇 다르다. 모성애는 길복순이라는 인물을 구성하는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일 뿐이다. 엄마라고 해서 가정적이고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만 하지 않는다. 희성(구교환)과 민규(설경구) 사이에서 사랑을 즐기기도 하고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딸 재영(김시아)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맡은 일은 완료하고 퇴근해야 한다. 그러면서 재영의 엄마, 학부모로서의 역할도 다한다. 모든 사람에게 여러 가지 모습이 있듯이, 복순에게도 다양한 모습과 성격이 공존하고 그 안에 모성애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길복순’은 모성애보다는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확히는 재영과 함께 성장하는 복순의 이야기다. 재영은 중학교 2학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엄마인 복순이 자신의 딸에게 벽을 느끼는 이유는 재영이 정체성 확립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복순의 딸’이었다면 이제는 ‘길재영’이라는 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재영은 복순을 변화시킨다. 17살의 어린 나이부터 청부 살인 회사에 소속되어 정해진 업무만을 수행해오던 복순에게 재영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복순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때마침 회사와의 재계약 시기가 맞물려 있었고, 복순은 변화한다.
길복순이 은퇴를 결심하고 업무 처리 과정에서 돌발 행동을 하는 등 그의 가치관이 변화한 원인에 대해 단순히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혹은 모성애가 발동했다고 말하는 건 단편적인 해석이다. 길복순을 변화하게 만든 건 모성애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다. ‘길복순’은 복순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은퇴를 결심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나’를 찾아가는 성장 영화에 가깝다.
여전히 중년 여성 캐릭터에게 엄마라는 설정을 부여한 것은 한계점이다. 또한 액션 영화를 가장한 가족, 성장 영화의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존 윅’처럼 거침없는 액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전까지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모성애를 다루는 방식이 달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길복순을 단순히 ‘모성애 가득한 킬러’로만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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