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전 세계 무역·금융 결제망을 장악한 ‘달러 패권’과 관련해 “유럽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달러 의존도를 축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유럽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하며 대만 문제에서 미중 간 대립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국을 방문한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미국이 껄끄러워할 만한 발언을 함으로써 중국·러시아에 맞서 서방 단일 대오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구상에 균열이 생기는 모양새다.
9일(현지 시간) 마크롱 대통령은 방중을 마치고 돌아오는 대통령 전용기에서 폴리티코·AFP 등과 인터뷰를 통해 미국 달러가 국제 경제에서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다고 지적하며 달러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치외법권은 다른 나라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통치권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말한다. 최근 몇 년간 미국은 러시아·이란·중국 등을 달러 위주의 국제 금융망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제재했다. 이에 유럽 기업들은 이들 국가와의 무역·금융 거래를 포기하거나 2차 제재를 당할 위기에 처했고 이에 ‘달러의 무기화’를 추진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왔다.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이 같은 폐해를 막기 위해 유럽이 과도한 달러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달러 패권에 대한 중국·러시아·신흥국의 불만이 유럽으로 번졌다는 의미도 있다. 최근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도 “달러에 의존할 이유는 없다”며 중국과 아시아판 국제통화기금(IMF)인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논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마크롱 대통령은 “미중 갈등 같은 세계적 위기에서 유럽연합(EU)이 ‘종속국가(vassal)’가 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큰 전략적 자율성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에너지·국방·소셜미디어·인공지능(AI) 분야 등을 언급하며 “우리는 중요한 주제에서 다른 측에 의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며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대만 문제에서도 “미국이나 중국의 추종자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는 블록 대 블록 논리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역설했다. 그는 “유럽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우리 것이 아닌 위기에 휘말려 전략적 자율성을 구축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미국이 중국과 패권 전쟁을 벌이며 유럽에도 동참을 요구하고 있지만 유럽은 이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폴리티코는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주도로 유럽이 세계의 ‘제3의 슈퍼파워’가 되려는 그의 전략적 자율성 이론을 강조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AFP는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을 화나게 할 위험이 있으며 대(對)중국 접근 방법과 관련한 EU 내의 분열을 보여준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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