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14조인 서류비치 조항에는 공개열람이 가능하다는 게 없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민주노총 관계자)
21일 오전 10시쯤 서울 정동에 있는 민주노총 입주건물 1층 입구 앞. 민주노총의 회계 자료 비치 및 보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방문한 고용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 2명 모두 민주노총 관계자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 방문하자마자 행정조사예고서를 낭독한 감독관 중 한 명은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서서 민주노총 관계자의 말을 들었다. “다시 한 번 (회계 자료를 볼 수 있는지) 논의해 달라”는 요청을 거듭한 뒤 감독관 2명은 현장 조사를 못하고 10여 분 만에 발길을 돌렸다.
고용부의 사상 첫 노조 회계 자료에 대한 현장 조사가 무위에 그쳤다. 일각에서 우려했던 현장 조사 과정에서 감독관과 양대 노총 간 물리적 충돌은커녕 폭언 한 마디 오가지 않았다. ‘왜 과도하고 부당한 행정을 하느냐’는 민주노총의 지적에 현장 감독관들은 진땀을 뺐다.
고용부는 이날부터 2주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민주노총 등 정부의 회계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한 노조 42곳에 대해 현장 조사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날 조사 대상 노조 8곳 중 3곳(민주노총, 한국노총, 금속노조)은 조사를 거부했다. 감독관들은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양대 노총 관계자를 만났지만, 이들의 현장 조사 거부 방침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번 조사는 노조의 회계 투명성 강화 대책 일환으로 노조가 법에 맞게 회계 자료를 비치 및 보존했는지 확인하는 게 목적이다. 이날 민주노총을 찾은 감독관이 민주노총에 설명했던 노조법 14조가 이번 회계 자료 제출 요구와 현장 조사의 핵심 근거다. 고용부는 이 조항을 근거로 자료 비치를 직접 확인하고 이를 응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부과에 나설 방침이다. 반면 민주노총 관계자는 “법에 따라 자료를 비치했고 조합원이 원하면 언제든지 열람이 가능하다”며 “이날 현장조사는 민주노총이 법을 어긴 것처럼 보이게 하는 프레임이다”라고 말했다. 이날 민주노총 앞에는 현장 조사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 수십여명이 모였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감독관의 주장은 겉돌았다.
이날 현장조사 불발은 예정된 수순으로 볼 수 있다. 양대 노총은 고용부가 자료 내지(內紙) 1장까지 요구하는 것은 관련 법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며 불응하겠다고 예고해왔다. 내지 제출로 노조 회계 적정성을 확인할 수 있냐는 지적이다. 게다가 양대노총은 노조 자료 제출 요구를 정부의 노동 탄압 연장선으로 여기고 있다. 이번 현장조사는 검찰의 압수수색처럼 당사자가 원하지 않을 경우 강행할 수 없다는 한계도 명백했다. 지난 1월처럼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민주노총 간부의 위법 혐의를 밝히기 위한 압수수색이 아니란 얘기다. 이미 고용부 내부적으로 현장 조사 과정에서 노조 의견을 충분히 듣기로 했다.
이날 오후 1시 한국노총 현장조사도 마찬가지다. 한국노총 관계자들은 사무실이 있는 7층에서 감독관 4명과 면담했다. 한국노총도 민주노총처럼 노조법 27조인 노조 자료 제출을 고용부가 과도하게 해석했다는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자료 표지와 십여년 동안 자료 사진까지 찍어서 고용부에 이미 제출했다”며 “정부가 (이런 식으로) 자료를 보겠다는 것은 남의 집 가계부를 보겠다는 것과 다름 없다”고 지적했다.
양대 노총의 현장 조사 거부가 법적으로 가능했는지 여부는 법원에서 가려질 전망이다. 고용부는 현장 조사를 거부하거나 방해할 경우에도 질서위반행위 규제법에 따라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양대 노총은 고용부가 과태료를 부과하면 이의제기 절차로 대응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대법원까지 법적 판단을 받겠다”고 말했다. 이미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정식 고용부 장관을 노조 회계 자료 요구와 관련해 직권 남용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했다.
고용부는 양대 노총에 대한 추가 현장 조사를 검토 중이다. 현장 조사 거부에 대한 과태료 부과는 노조별 상황에 따라 이뤄질 전망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감독관들이 이날도 민주노총 관계자를 다시 만나 조사 취지를 설명했다”며 “현재로선 노조를 계속 설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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