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정부는 경북 경주의 신라 능묘를 정비하고 관광지로 꾸밀 계획을 추진했다. 당초 황남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98호 무덤(황남대총)을 조사해 내부를 공개할 계획이었지만 당시 국내 고고학 수준으로는 그런 커다란 무덤을 발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보다 작은 155호 무덤을 연습 삼아 조사했다. 155호는 5세기말 6세기초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1973년 발굴조사에 착수한 155호 무덤에서는 금관보다 더 귀한 유물이 확인됐다. 신라의 유일한 회화 자료이며 보통 ‘천마도’라고 하는 바로 그 국보 ‘천마그림 말다래’다. 이를 포함해 국보와 보물 10 등 총 1만1500점이 나왔다. 이후 무덤은 천마총으로 불린다.
문화재청과 신라왕경핵심유적복원정비사업추진단은 천마총 발굴 50주년을 맞아 4일 경주 국립경주박물관 특별전시관에서 ‘천마, 다시 만나다’를 통해 ‘천마도’를 일반에 공개했다. 전시는 7월16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1973년 첫 발굴에 참여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이날 전시회를 돌아본 후 “그렇게 어려운 발굴은 처음이었고 또 이런 유물이 나올 것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함순섭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천마도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고고학도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실은 1~3부로 이뤄져 있는데 천마도는 3부 ‘다시 만난 천마의 이야기’를 주제로 가장 안쪽에 놓여져 있다. 단독 유리케이스에 놓여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천마도, 즉 ‘천마그림 말다래’의 크기는 가로 76㎝, 세로 45㎝다.
말다래는 말 탄 사람의 다리에 흙이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을 말한다. 천마도에는 어두운 색깔의 자작나무 껍질에 어둠을 뚫고 하늘을 달리는 듯한 백마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래서 이 말은 ‘천마(天馬)’로 해석된다. 신라시대 천마는 하늘과 딸을 이어주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림 속 천마의 갈기와 꼬리털은 불꽃처럼 날리고 있다. 다리 주위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표현되고 가슴도 앞으로 내밀어 당당하다. 천마 주변에는 꽃 같은 무늬로 수놓아져 있다. 천마도가 일반에 공개된 것은 지난 2014년 이후 9년만이다. 천마도 자체가 공개된 것은 발굴 50년 만에 4번에 불과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천마도 있다. 대나무살로 엮어 만든 바탕 판을 천으로 감싼 뒤 그 위에 천마 무늬를 새긴 금동 판을 덧대 만든 천마총 말다래 1개, 천마총 외 금령총과 금관총에서 나온 천마 무늬 말다래 각각 1개씩이 함께 공개된다. 이번처럼 천마 관련 유물 4개가 모두 모인 것은 역대 최초라고 한다.
자작나무 천마도도 원래 Ⅰ·Ⅱ 두 개가 있다. 발굴될 때 같은 모양의 천마도 두 개가 겹쳐서 발굴됐다. 다만 위쪽에 있던 다른 천마도(I)은 상대적으로 손상이 심했다. 4일 공개된 것은 아래쪽에 있던 천마도(Ⅱ)다. 천마도Ⅰ은 6월 12일에 천마도Ⅱ와 교체돼 전시된다.
전시실 1부에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천마총 출토 황금유물 촬영작품 11점이 소개돼있다. 바탕색이 다른 작가들이 주로 검은색 개통을 하는 것과는 달리 구 작가는 황금색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전시실 2부에서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제대관과 금허리띠 등 황금 장신구들과 푸른빛의 유리잔, 목걸이가 선보였다.
문화재청과 경주시는 이날 경주 대릉원에서 천마총 발굴 50년의 성과와 발전을 되돌아보고 미래 100년을 다짐하는 ‘1973, 천마를 깨우다’ 비전 선포식을 열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앞으로의 100년은 신라 문화유산이 ‘K-헤리티지’의 중심에서 세계인이 찾고 주목하는 더 큰 ‘신라류’(Silla-Wave)의 파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경주)=최수문기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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