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에게 불리하게 회사 취업규칙을 바꿀 경우 회사가 반드시 노동조합·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규칙 변경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된다면 노조 등의 동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기존 판례가 뒤집혔다. 경영계는 “노동법의 경직성을 다소 완화할 수 있는 판례 법리가 깨졌다”며 유감의 뜻을 표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11일 현대자동차 간부 사원과 회사 간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에서 피고의 일부 패소 부분을 파기해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날 판결에서 대법관은 7 대 6으로 의견이 갈렸다. 현대차는 2004년 주 5일 근로제 도입에 따라 과장급 이상 간부를 대상으로 한 간부 사원 취업규칙을 별도 제정했다. 개근자에게 1일씩 부여하던 월차 휴가 제도를 폐지하고 연차휴가에 25일의 상한을 둔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현대차는 간부 사원 가운데 89%의 동의를 얻었다. 하지만 노조 동의는 받지 않았다. 이에 현대차 간부 사원들은 새로 도입한 취업규칙이 무효라며 연월차 수당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쟁점은 근로기준법 제94조(규칙의 작성·변경 절차)에서 규정된 노조 등 동의 여부였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기업은 취업규칙 작성·변경 때 노조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특히 해당 규칙이 근로자에게 불리한 경우에는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다만 기존 판례에서는 규칙 작성·변경안이 ‘사회통념상 합리성’을 갖췄다면 근로자의 집단 동의가 없더라도 예외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면서 집단적 동의를 받지 못한 경우 (노조 등이) 동의권을 남용했다고 볼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취업규칙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유효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근로자의 집단적 동의권은 헌법·근로 기준이 명시한 근로 조건의 노사 대등 결정 원칙을 실현하는 중요한 절차적 권리라 취업규칙 내용의 타당성·합리성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취지다.
또 “사회통념상 합리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확정적이지 않고 당사자가 쉽게 알기 어렵다”며 “취업규칙 변경의 효력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 계속돼 법적 불안정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다만 노조 등이 동의권을 남용할 경우는 예외 사유로 제시했다. 6명 대법관은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는 대법원이 오랜 기간 그 타당성을 인정해 적용한 것으로 현재도 여전히 타당해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라는 점을 소수의견으로 제시했다.
앞서 1심에서는 ‘간부 사원들이 종전 취업규칙에 따라 미지급 연월차 휴가수당을 직접 청구할 수 있어 부당이득이 성립하지 않는다’며 회사 측의 손을 들어줬다. 규칙 변경 등에 대한 ‘사회통념상 합리성’과 무관하게 부당이득 여부로 판단을 내린 셈이다. 반면 2심은 ‘근로자 동의를 받지 않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원고 일부 승소로 봤다.
사회통념상 합리성 법리를 부인하는 대법원 판결에 산업계 측은 즉각 불만을 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측은 이날 논평을 내고 “일본의 경우 2007년 판례 법리를 노동계약법에 명문화해 (노동) 유연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며 “근로조건 결정 시스템의 유연성과 기업 경쟁력을 확보해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을 때는 (노조 등의) 집단적 동의가 없더라도 취업규칙 변경이 가능하도록 법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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