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미안, 자이, e-편한세상, 롯데캐슬, 푸르지오…. 웬만한 지방 소도시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대형 건설사의 아파트 브랜드들이죠. 지난 1999년 삼성물산이 래미안을 정식으로 상표권 출원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파트 브랜드 마케팅 전쟁, 한국에서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브랜드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거의 한 세대가 흐른 셈인데요. 하지만 개별 단지명을 살펴보면, 뜻이 좋은 영어단어를 다 갖다 붙이는 바람에 길고 복잡해지는 경향도 관찰됩니다. 그 결과 어르신들은 물론이고 외국인들에게도 낯설고 말하기 어려운 단지명도 종종 탄생하고는 하죠. 한 때 미국 아이비리그에 입학하고자 신청한 한국 학생들의 주소가 죄다 성(캐슬 또는 팔레스)이라 입학처 관계자들이 어리둥절 했다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뜬소문마저 돌 정도였습니다.
제가 머물고 있는 일본에서는 어떤 공동주택 브랜드가 있을까요? 지진이 잦은 나라여서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4~5층의 공동맨션이나 단독주택이 주류인 이곳 사람들도, '나는 래미안에 산다'는 광고를 접하고 있을까요? 우선 제 답변은 모두 '예' 입니다. 사실 이 글의 시작도 통학하며 타고다니는 지하철에서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모 맨션의 광고였는데요. 광고의 흐름은 한국과 비슷합니다. 멋들어진 외관, 안락한 실내, 그리고 세심하게 꾸며둔 정원을 주르륵 훑으며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광고에 투영하고 있더군요. 직접 영상을 보시지 않았더라도 상상 가능하시죠?
그렇다면 일본에서도 한국처럼 공동주택 브랜드 선호도가 뚜렷하게 나뉠까요? 제가 한국에서 부동산 업계를 취재하면서 모델하우스를 여러번 방문했던 기억을 되짚어보면, 주택을 구입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특정 브랜드에 대한 선호가 있었습니다. '나는 A는 너무 좋은데 B는 좀 올드한 느낌이다'라거나 'C는 시공이 부실하다', 'D는 외관만 예쁘고 실내는 영 별로다' 등등처럼 말이죠. 부동산 R114 같은 전문 리서치업체는 대규모 소비자 설문조사를 통해 선호도 순위를 매기기도 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리서치나 마케팅업체가 주기적으로 시장 조사를 기반으로 선호도가 높은 브랜드를 발표하고는 합니다. 다만 한국과 다른 점은 타워맨션 같은 초고층 맨션을 포함해, 브랜드를 강조한 맨션에 거주하는 인구보다는 그렇지 않은 인구들이 많은 탓인지 한국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느낌은 덜합니다. 하지만 기시감이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소비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강조한 이름이 있다는 거죠. 그게 무엇일까요?
2019년 4월부터 2020년 3월까지 부동산 전문 서비스업체 홈즈에서 실시한 조사를 한번 살펴볼까요. 조사대상이 390팀으로 다소 적은 감이 있지만 나름 이유가 구체적입니다. (참고로부동산 R114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베스트 아파트 브랜드는 설문조사 대상이 5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이 조사에 따르면, 미쓰비시지쇼레지던스(三菱地所レジデンス)의 '더 파크하우스'가 선호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관리가 철저하고 품질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요. 분양을 한 번 받으면 그 집에서 수십여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일본답게, 오랫동안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맨션이 모토라고 합니다. 또 분양받는 개인의 특성에 맞춰 인테리어 신청을 하거나 제안받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네요.
해당 조사에서 밝힌 브랜드 선호도 2위는 미쓰이 부동산 레지덴셜(三井不動産レジデンシャル)의 '파크 코트'입니다. 여기는 입주민들이 공유하는 공간에 영국식 정원을 설계한 상품을 선보이기도 하고, 수영장이나 체육관 등도 함께 마련하기도 하는 맨션 브랜드라고 하네요. 자, 그럼 브랜드 선호도 3위는 어떤 이름일까요? 아, 또 '파크'가 붙습니다. 2위에 자사 브랜드를 올렸던 미쓰이 부동산레지덴셜의 '파크 홈즈'네요. 해당 조사는 업체 중복여부와 관계없이 선호도만 따져 1~10위 브랜드를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파크가 들어간 브랜드명은 총 4개였습니다. 무엇보다 선호도 1~3위에 모두 파크가 들어간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죠. 비록 회색빛 도시에 살지만, 푸르른 숲과 한적한 산책로를 품은 공원을 가까이 하고 싶은 소비자의 심리를 반영한 것으로 봐도 좋지 않을까요? 차익거래를 중시하는 한국 아파트 시장은 그 특성을 반영해 단지명에 반포나 잠실 등 지역명을 어떻게 넣을 것이냐를 두고 개발주체와 수분양자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뭐 아예 틀린 해석은 아닐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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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 부동산 업계에서는 매출규모가 크고 업력이 오래된 7개 부동산 개발업체(디벨로퍼)를 '메이저7'라고 하는데요. 이들이 전력투구해 만든 맨션 브랜드를 핵심으로 보는 이들도 많습니다. 메이저 7에 포함되는 회사는 스미토모 부동산 다이쿄 토큐 부동산 도쿄 타테모노 노무라 부동산 미쓰이 부동산 미쓰비시 지쇼인데요. 이들 회사는 도쿄는 물론 일본 전역에서 신축 분양맨션을 개발하고 판매하고 있습니다. 2019년 공급된 맨션은 7만660호였다고 하는데요, 이 메이저 7개사에서 공급한 규모는 1만9398호로 전체의 27.5%를 차지했다고 해요. 가장 많이 공급한 회사는 스미토모 부동산(5690호)였고요.
이들 회사들은 당연하게도 자신들의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다만 한국처럼 유명 아파트 브랜드들이 한 회사에 1~2개에 불과한 것과는 다르게, 여러개를 보유한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1위부터 살펴볼까요. 공급규모가 가장 많은 스미토모부동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맨션 브랜드는 시티 하우스입니다. 그 다음인 다이쿄는 라이언즈 맨션을 내세우고 있네요. 토큐부동산은 브란츠(BRANZ), 도쿄다테모노는 브릴리아(Brillia), 노무라부동산은 프라우드(PROUD), 미쓰이부동산은 아까 잠시 언급했던 파크홈즈(Park Homes), 미쓰비시지쇼는 더 파크 하우스(The Park House) 등입니다. 이 가운데 저는 브릴리아, 프라우드, 더 파크하우스 내외부를 견학하거나 거주하는 지인의 집에 방문해본 적이 있는데요. 외관이나 공용공간 설계 등에서 브랜드마다 특성이 있는 부분들이 보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한국만큼 브랜드가 두드러지게 노출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또 특징이라면 특징인데요. (고개를 들어 근처 아파트 단지 외벽을 보십시오. 로고가 아주 큼지막하지 않습니까? 주문은 또 어떻고요. 왕궁에 입성하는 느낌이죠.) 최근에 분양하는 맨션은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제가 방문했던 곳들만큼은 브랜드를 '티나게' 내걸지는 않았던 기억입니다.
어찌 보면 일본 부동산 개발업계는 한국보다 더 어려운 과제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놓고 ‘래미안이예요, 자입니다, 아크로네요?’ 라고 공표하는 꺼리는 일본 소비자들에게 자사 브랜드만의 장점을 알리고 또 이해 시켜야 하기 때문이죠. 무엇보다 한국만큼 부동산 투자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지 않은 일본에서 수천엔을 호가하는 맨션을 '브랜드력'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할 듯 싶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어디든 쉽지 않은 시장인 것은 분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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