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노동조합 조합원 B씨는 지부장에 대한 5억원 상당의 조합비 횡령 의혹을 제기했다. 경찰은 이 의혹을 수사 중이다. 하지만 A노조는 B씨의 문제 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조합원 자격을 없애는 제명 처분을 했다. 심지어 B씨는 ‘소송 등을 통해 사측으로부터 해고하도록 만들겠다’는 노조의 협박까지 시달리고 있다. B씨는 결국 1월 26일 고용노동부가 만든 ‘온라인 노사 부조리 신고센터’에 이 상황을 신고했다. 관할 노동지청은 조사를 통해 B씨의 제명 처분이 노동관계법령 위반(대의원대회 절차 등)이라고 판단하고 조합원 복권 조치에 나섰다. B씨가 그대로 제명됐다면, A노조 내에선 횡령 의혹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다른 조합원의 정당한 문제 제기까지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방조하거나 묵인할 수 밖에 없었던 노사 부조리를 바로 잡아 달라는 민원이 쏟아지고 있다. 노조의 비리뿐만 아니라 임금 체불, 노조 활동 방해 등 사측의 우월적 지위 남용도 수면 위로 올랐다. 윤석열 정부가 노동 개혁의 제 1과제로 노사 모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법치주의를 내세운 배경으로 평가된다.
14일 고용부에 따르면 부조리 신고센터가 개설된 1월26일부터 이달 5일까지 100일 동안 접수 건수는 973건을 기록했다. 고용부는 이 중 72%인 697건에 대해 조치를 완료했다. 조치율이 이 만큼 높다는 의미는 상당수 민원이 단순 의혹을 넘어 사실 관계가 그만큼 명확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신고건 973건은 크게 노조의 불법 행위와 사용자(사측)의 불법 행위로 나뉜다. 고용부는 두 유형의 구체적인 수치와 비율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신고센터 약 한 달 간 이뤄진 301건 통계에서는 임금 체불, 직장 내 괴롭힘, 부당해고 등 근로자 불이익이 250건으로 83%였다. 근로자가 기업 보다 훨씬 많고,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이 14%인 탓에 구조적으로 근로자 민원 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주목할 부분은 이날 공개된 주요 신고건을 보면 정부가 노조 투명성 강화와 같이 노사 법치주의를 내건 배경이 읽힌다는 점이다. C 노조는 코로나19 사태로 외부 행사와 쟁의행위가 없던 기간에도 쟁의기금 직책 수행비, 판공비, 접대비 등을 유용한 정황이 드러났다. 금액은 약 6000만원이다. 고용부는 경찰에 부당 유용 혐의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D노조는 지역 업체와 산별노조 지부 간 노사합의서를 체결하는 방식으로 해당 업체에 매월 70여만원씩 노조발전기금을 수령해왔다. 고용부는 이 요구가 법적으로 정당한지 조사 중이다.
사용자가 일명 노조를 어용 노조로 만들어 노조의 고유 기능을 망가뜨린 사례도 있었다. E 기업은 근로를 제공하지 않는 노조 간부 5명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차량까지 제공했다. 노조에 정규직 직원 채용을 요구하지 않는 댓가로 노조 운영비까지 지원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F 기업은 노조 간부의 가족이나 친인척을 채용해 달라는 청탁을 받아 고용부 조사 선상에 올랐다. 민원 중에는 임금 체불과 근로시간 위반, 직장 내 괴롭힘도 상당수를 차지했다.
고용부는 이런 노사 부조리를 투 트랙으로 대응 중이다. 우선 신고센터 상설화와 현장 감독 범위와 기간을 넓혀 불법 행위에 대한 조사·처벌 체계를 강화했다. 또 고용부는 여당과 노사 부조리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제도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 당정은 노조 운영 및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 중이다. 3일 상습 체불 근절 대책을 발표한 고용부는 공짜노동을 부추기는 포괄임금 오남용 대책과 부정채용을 막는 공정채용법 방향을 조만간 발표한다.
하지만 노동계는 일련의 노사 부조리 대책이 노조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치우쳤다고 반발한다. 노조 회계 투명성 강화가 노조 운영·자주권을 훼손했다는 것이다. 노동계에서는 노사 부조리가 대부분 사용자 잘못으로 빚어진만큼 사용자에 대한 강한 규제 대책이 필요하다고 촉구한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1월 신고센터 운영 계획을 밝히면서 “현장의 잘못된 관행과 무너진 법과 원칙을 바로잡는 게 노동 개혁의 출발”이라며 “노조가 사회적 위상과 역할에 걸맞은 책임을 다해 신뢰를 얻는 조직이 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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