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 간 디커플링(탈동조화) 움직임이 첨단기술 산업 뿐만 아니라 식량 분야에서도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 최근 본격적으로 미국산 농산물 의존도를 낮추자 일각에서는 신냉전 구도가 식량 분야로까지 확장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부쩍 식량 안보에 집중한 중국 공산당이 최근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우방국 위주로 곡물 공급망 다변화에 속도를 내는 모양새다. 세계 최대 식량 소비국이자 생산국인 중국이 식량 안보 강화에 속도를 낼 경우 국제 식량 시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브라질, 거래 중단국에서 中 최대 옥수수 공급원 등극
중국 세관총국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 브라질은 우크라이나를 제치고 2위 옥수수 수입국으로 올라섰다. 중국이 수입한 전체 옥수수 752만 톤(t) 가운데 브라질산은 약 216만t(28.8%)을 차지했다. 미국의 경우 37.8%로 1위를 유지했지만 지난해(72%)에 비하면 그 비중이 대폭 추락했다.
2020~2021년 수확기까지만 해도 미국과 우크라이나는 중국이 구매한 옥수수 가운데 각각 70%, 26%를 공급한 부동의 1·2위 국가였다. 반면 브라질은 중국 당국의 품질 문제 지적으로 9년 가까이 판매 허가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양국 정부가 병충해 대비·위생 검증 문제 등을 합의하며 거래가 재개됐고 브라질은 빠르게 주요 교역국으로 성장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중국 국영 경제지는 “중국은 (브라질과의) 곡물 외교를 통해 우방국의 범위(circle of friends)를 확장하고 세계 식량 공급망에 대한 대응 역량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호평을 내놓았다.
이처럼 중국의 옥수수 수입 구조가 급격히 재편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미중 전략경쟁 심화 등 지정학적 지형 변화를 배경으로 한다. 중국 공산당은 개전 이후 전세계 곡물 가격이 요동치고 미중 관계가 악화하자 식량 안보를 빈번히 강조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해 연말에도 “자력에 의지해 밥그릇을 든든히 받쳐 들어야 한다”며 생산 자립의 중요성을 재차 언급한 바 있다. 장기적으로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하되 그 전까지 서방 식량 의존도를 낮추고 우방국 위주로 수입 경로를 재편하겠다는 것이 중국의 계획이다. 브라질과의 합의 당시에도 미국과 경제·안보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만큼 외신은 미국 농업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도 포함됐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아프리카·중남미 곡물 외교 확대…美中 농산물 거래에 찬물
최근에도 중국의 ‘곡물 외교’는 미국과의 거래 파기와 맞물려 이뤄지는 모양새다. 이달 4일에는 오랜 우방국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 수입한 사료용 옥수수의 1차 선적분 5만 3000t이 중국에 도착했다. 이 거래를 주도한 중국 국영 중량그룹(COFCO)은 성명을 내고 남아공 43개 옥수수 농가와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며 조달량을 늘리고 정기 운반선 운행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은 남아공과 옥수수 거래를 트며 ‘식량 안보 강화’를 이유로 들었지만 직전에 미국산 옥수수 주문은 되레 취소해 눈길을 끌었다. 수입 경로 다변화 정책의 기저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 농무부가 4일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수입업자 측은 지난달 마지막 주에 미국산 옥수수 56만 2000t의 주문을 취소했다. 농무부는 그 여파로 주간 옥수수 수출 판매량이 1999년 이후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이에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은 더 많은 남반구 국가들로 옥수수 공급선을 다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지정학적 갈등으로 인한 가격 인상과 계절적 요인에 따른 공급량 변동을 상쇄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2018 무역 전쟁 이후…美 대두와 '거리 두기' 필사적
해외 수입 의존도가 특히 높은 대두(콩)은 옥수수에 앞서 우방국 위주로 이미 공급망이 재편된 품목이다. 중국은 돼지 사료와 식용유 원료 등으로 쓰여 식탁 물가와 직결되는 대두의 80% 이상을 브라질과 미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현재 최대 대두 공급국은 브라질이지만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점유율이 비등한 수준이었다. 당시 중국과 미국이 연달아 보복성 관세 폭탄을 상대국에 부과하며 미 농산물의 경쟁력은 대폭 떨어졌고 브라질산 대두가 대체 공급원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2018년 중국이 수입한 전체 대두 가운데 브라질산이 80%에 달하는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며 전세가 역전됐다. SCMP는 대두가 “미중 갈등으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무역 상품 중 하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옥수수 역시 지속적으로 미국산 의존도를 낮추며 ‘제2의 대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와 관련해 정펑톈 중국 인민대학 농업농촌발전학원 교수는 “현재 미국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중국에게 식량은 (컴퓨터) 칩 다음으로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 곡물 수입 줄이고 수출·자급률 확대…글로벌 곡물시장 지각변동 예고
중국은 더 나아가 지정학적 위기로부터 ‘밥줄’을 완전히 보호하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서방이 반도체는 물론 식량에도 제재를 부과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중국 농업농촌부가 지난달 공개한 ‘중국 농업전망 보고서(2021~2032)’에 따르면 중국은 10년 내로 곡물(쌀·밀·옥수수·콩 등) 자급률을 현재 82%에서 88.4%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전체 수입 규모는 지난해 1억 4690만t에서 올해 1억 2200만t까지 줄이는 것이 목표다. 특히 수입 의존도가 높은 옥수수와 대두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체적으로 중국은 현재 20% 이하인 대두 자급률을 2032년까지 30%로, 향후 10년 간 연평균 7%씩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수입량을 낮추기 위해 아예 가축사료 내 대두 비율을 2025년까지 13% 미만으로 낮추겠다는 3개년 행동계획도 발표했다. 옥수수 역시 2032년까지 자급률 96.6% 달성을 기대하고 있다. 이밖에 10년간 쌀 수출량을 24% 이상 늘리겠다는 목표도 제시됐다.
이같은 식량안보 계획이 상대 교역국들에 타격을 입히는 것은 물론 글로벌 곡물시장 전체를 움직일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네덜란드 라보방크 은행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이 현재 국제 대두 교역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점진적인 대두 수입 감소가 글로벌 공급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했다. SCMP 역시 “중국이 제시한 식량공급망 다각화 계획은 향후 10년 동안 미국의 옥수수·대두 생산자들은 물론 태국,베트남의 쌀 수출업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경고를 보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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