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잇따른 석유파동과 달러화 약세로 인한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인플레이션)이 미국을 휩쓸었다. 연간 물가상승률은 무려 15% 이상이었다. 폴 볼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연준) 의장에 취임한 것은 바로 그 시점, 1979년이었다. 그는 임명 직전 지미 카터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연준의 독립성이 절대적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벌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임자인) 밀러 의장이 유지해온 통화정책 기조보다 더 긴축적인 기조를 지지합니다.”
당연히 정치가들은 긴축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거 승리를 위해서는 경기부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통화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놓고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지만 결국 볼커는 연준 의장에 취임했다. 당시 최고의 카드였기 때문이다. 볼커는 1987년까지 연준 의장을 2연임 했다.
자신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볼커는 취임 열흘 뒤 곧바로 재할인율을 10.5%로 인상했다. 사상 최고 수준이었다. 금리조정으로는 부족했던지 통화공급 또한 억제하기 시작했다. 시중 금리가 무려 21%까지 올랐다.
당연히 고금리에 대한 불만이 늘어났다. 농부들이 워싱턴으로 몰려와 연준 빌딩을 트랙터로 에워싸기도 했고 무장한 괴한이 연준 건물에 난입해 이사들을 인질로 잡아 놓으려던 사건까지 발생했다. 연준은 볼커를 24시간 경호해야 했다. 그는 아예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신간 ‘미스터 체어맨-폴 볼커 회고록(원제 Keeping at it:The quest for sound money and good government)’는 ‘영원한 인플레이션 파이터’라고 불리는 폴 볼커(1927~2019)의 자서전이다. 원서는 그가 죽기 1년 전인 2018년에 출간됐으니 번역은 다소 늦었다. 원서로서 이미 금융 및 경제정책 분야에서 필독서 중에 필독서라고 한다.
통화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내재적 가치가 없는 명목화폐에 의존한다. 화폐가치가 안정돼 현재의 화폐로 오늘이나 내일, 내년에도 같은 것을 구매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뢰를 유지하는 것은 통화정책의 핵심 책무다.
한번 화폐가치가 무너지고 신뢰를 잃으면 이를 다시 안정시키는 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투기와 위험추구는 금융시장에 거품을 만들고 이는 연쇄 과열로 이어진다.
“일부 증권매매업자와 투기업자는 이익을 보겠지만 임금 근로자나 대부분의 은퇴자처럼 고정 소득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삶은 힘들어진다”는 것이 볼커의 신념이었다.
물론 즉각적인 경기부양을 위해 저금리를 요구하는 정치가는 예나 지금이나 많았다. 볼커가 연준 의장으로 있을 때도 레이건 대통령은 ‘선거를 위해 금리를 더 이상 올리지 말라’고 압박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볼커가 사망하고 난 직후 전세계를 휩쓴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라 각국이 저금리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다시 한번 초인플레이션이 확대됐다. 최근 미국 연준을 비롯한 각국 중앙은행들이 긴축에 나선 이유다. 볼커의 유산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책의 국내 번역이 늦어진 것은 팬데믹 기간 저금리 상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파이터’의 이야기를 하기는 불편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지난해부터 격렬해진 인플레이션이 이 책을 다시 불러낸 것이다.
‘인플레이션 파이터’ 외에도 볼커는 국가 행정을 효율화하고 유능한 정부를 구성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볼커는 ‘권한’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될 것 같은 자리에 ‘책임’이라는 단어를 더 자주 썼다고 한다. 공직자로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후생을 증진 시키는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유능한 정부’ ‘좋은 정부’라는 말이 농담이 되어버린 요즘 공직에 대한 그의 헌신은 독자에세 새로운 영감을 줄 수 있을 듯하다.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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