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에 원점으로 돌아간 간호법 제정 논란이 의료계 해묵은 난제들로 옮겨붙는 모양새다. 간호사단체가 간호법 제정의 취지를 알리겠다며 진행 중인 '준법투쟁'을 계기로 PA(Physical Assistant·진료보조) 간호사들의 불안정한 법적 지위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의료법에 없는 PA를 1만 여명이나 양산하게 만든 근본 원인이 의사 수 부족 때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코로나19 기간 미뤄놨던 의대 정원 확대 논의도 불가피해졌다.
◇ 복지부, 협의체 구성…수면 아래 있었던 ‘PA 문제’ 공론화 의지
24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다음달부터 전문가와 현장 종사자, 관련 단체 등이 참여하는 협의체를 구성해 PA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병원의 인력 구조와 보건의료인 간 업무범위 등 그간 암묵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PA 관련 논의를 공론화하고, 제대로 된 개선방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PA는 진료, 검사, 수술 등 의사의 진료 행위를 돕는 보조인력을 통칭한다. 2010년 국내 처음 도입된 이후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대폭 증가하면서 전국에 1만 명이 넘는 인원이 활동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의료계 내부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주요 선진국에서 PA 면허를 운영하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의료법상 별도 면허 범위가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PA 간호사가 담당하는 업무는 수술장 보조부터 검사 및 시술 보조, 검체 의뢰, 응급상황 시 보조 등이 주를 이룬다. 의료법 제2조는 간호사의 임무를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의 보조’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진료의 보조’라는 용어 자체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의사 수가 부족한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사실상 의사가 해야 할 업무의 일부를 대신하는 게 관행처럼 여겨졌다.
수술실 보조나 수술 후 처치(드레싱 등) 등 대학병원 전공의(레지던트, 인턴)가 해야 하는 업무를 대신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담당 교수와 함께 회진을 돌거나 의사 ID로 접속해 처방을 대신 내는 대리처방 등 의료법에 저촉되는 행위도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간호법 제정이 사실상 무산된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대한간호협회가 그동안 암묵적으로 해왔던 진료보조 업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준법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한 데도 이러한 불편한 현실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간호법이 별도로 제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어필하겠다는 취지다.
◇ 간협, 간호법 제정 불발에 발끈…채혈·대리처방 등 '불법 의료행위' 거부
간협은 ‘불법의료행위 리스트’까지 만들어 의료기관에 배포하고 신고를 받고 있다. 리스트에는 대리처방, 대리기록, 대리수술, 수술 수가 입력, 수술부위 봉합, 수술보조(1st, 2nd assist), 채혈, 조직 채취, 천자, L-tube(비위관) 및 T-tube(기관절개관) 교환, 기관 삽관, 봉합, 관절강내주사, 초음파 및 심전도 검사, 항암제 조제 등이 포함됐다. 피검사를 위한 채혈이 임상병리사의 업무로 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진료 보조'라는 의료법 조문을 근거로 간호사가 시행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간협이 17일 불법의료행위 리스트를 배포한 다음날인 18일 오후 온라인 불법진료 신고센터가 열린 지 1시간 30분 만에 신고가 몰리면서 서버가 마비됐다는 얘기도 흘러 나온다. 간협은 신고 사례를 취합해 오늘(24일) 오전 기자간담회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간호법 제정에 반기를 들었던 대한전공의협의회도 간협의 ‘준법투쟁’을 적극 지지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이참에 서로의 업무 범위를 명확히 하고, 고질적인 인력난 문제도 해소하자는 것이다.
인턴, 레지던트 등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인 의사들의 단체인 전공의협의회는 19일 성명을 통해 “간협의 준법투쟁을 대환영한다”며 “병원에서 전공의 주 80시간제 이후 충분히 대체 의사인력을 채용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가 현재 만연한 대리수술과 대리처방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간협이 제시한 불법 업무 리스트 중 정맥혈 채혈 업무는 의사의 지시 및 감독 하에 간호사가 하는 게 합법적인 행위로, 간호사가 이를 수행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의사의 ID를 빌려 간호사가 대리처방과 대리수술을 하는 게 정상적인 의료환경은 아니라고 본다"며 "전공의법 시행 이후 PA 간호사가 전공의의 빈 공백을 메우도록 중용하거나 이를 지지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다"고도 강조했다.
◇ 불법 경계 놓인 PA 간호사들, 불안정한 법적 지위 개선 요구
PA 간호사들은 법적 지위가 불안정한 데 대한 개선 요구가 높다. 2020년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이 공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PA 간호사는 △의사 아이디로 처방 △전공의 없는 진료과에서 대리수술 △전공의가 없는 경우 환자 치료방향 결정 △동맥관 채혈 △수술·시술에 대한 동의서를 의사 이름으로 받기 △의사 가운 입고 환자 회진 등 환자의 건강에 직결되는 ‘대리의사’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불법 소지가 있다 보니 교육과정이 전무하고 PA 근무기간을 간호사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경우도 드물다.
전공의협의회와 간협은 간호법 제정에 관한 찬반 논란이 팽팽하게 맞서던 중 PA 이슈까지 불거지며 관계가 크게 악화되는 듯 했다. 이달 2일 전공의협의회가 기자회견을 통해 “간호법이 그간 암묵적으로 진료현장에서 행해졌던 대리수술과 대리처방을 합법화하는 계기로 작용할까 우려스럽다"고 발언한 점이 결정적 계기였다. 이에 발끈한 간호계 각 단체는 전공의협의회를 향해 "간호법에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며 비난을 쏟아냈다. 급기야 병원에서 PA 간호사로 근무 중인 7명이 얼굴과 이름을 가린 채 기자회견에 등장하면서 논란이 재점화된 것이다. PA 간호사들은 “간호법 어디에도 간호사 대리처방 및 대리수술을 합법화할 수 있다는 전공의들의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간호사는 누구나 본인의 면허범위 내 업무를 정정당당하고 하고 싶어하며 전공의 대체 업무를 하고 싶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고 밝혔다.
◇ 전공의들 “병원들이 인건비 줄이려 PA 간호사 고용…·수련기회 박탈”
두 단체는 PA가 불법 소지를 무릅쓰고 전국에 1만 여명이나 양산된 배경이 병원 내 인력난에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전공의들은 전공의법이 시행된 이후 주당 130시간 이상 일하던 전공의의 근무시간이 크게 줄긴 했지만, 병원들이 전담의나 촉탁의 등 대체 의사 인력을 채용하지 않고 그 자리를 PA 간호사로 채우면서 의사와 간호사의 업무 혼재가 더욱 심화했다고 보고 있다. 병원 입장에서는 전공의 1명을 더 채용하는 것보다, 인건비가 적게 드는 간호 인력에게 의사 업무를 일부 떠맡기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 유리하다 보니, 경영진들이 인건비를 절감하는 꼼수로 PA 간호사를 채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각각의 속사정은 다르다. 전공의들은 PA 간호사가 전공의가 해야 할 업무를 대신 하면서 수련 받을 기회를 빼앗기는 데 대해 높다. 앞서 전공의협의회가 지난 2018년 82개 수련병원 인턴 및 전공의를 대상으로 진행한 ‘2018 전국 전공의 병원평가’ 결과에 따르면 수련병원의 93%에 PA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참석한 전공의 4명 중 1명은 “PA로 인해 교육적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느꼈다”고 응답했다. 당시 이승우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은 “PA는 무면허 의료행위로 의료법을 위반하는 불법행위인 동시에 의사의 전문성을 침해한다"며 “수련생 신분이기도 한 전공의가 제대로 교육을 받기 위해서라도 무면허 의료행위는 근절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제 현장에서는 간단한 수술 보조의 경우 1~4년차 전공의보다 오랫동안 실무 경력을 쌓아온 PA 간호사를 더 선호한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 간호사들 “의사 수 부족이 불법 진료 양산하는 근본 원인…의대 정원 확대해야”
간협은 "의사 외 다른 직역으로 하여금 대리처방과 수술을 하도록 암묵적으로 승인하는 근본 원인이 정부의 의대 정원 동결 정책에 있다"고 보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를 필두로 의료계 내부에서는 의대 정원을 늘릴 필요가 없다며 버티고 있지만 당정은 물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의대 정원을 확대하라는 목소리가 높아 의대 정원 논의도 재점화될 공산이 커졌다. 그동안 의협은 코로나19 국면이 안정화돼야 의대 정원 관련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 11일 코로나19 엔데믹(감염병의 풍토병화)을 선언했고, 6월부터는 감염병 위기경보 단계가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된다. 의협이 제시한 논의 요건이 충족되면서 조만간 의대 정원 문제가 의료현안협의체의 논의선상에 본격적으로 오를 것이란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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