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로 숨진 고(故) 이도현군의 유가족이 차량 제조사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 첫 재판이 23일 열렸다. 유족 측은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법원은 향후 ‘음향 감정’을 통해 정상적인 급가속 시 나타나는 엔진 소리와 이번 사고에서 발생한 엔진 소리가 어떻게 다른지 따져볼 예정이다.
춘천지법 강릉지원 민사2부(박재형 부장판사)는 이날 급발진 의심 사고 차량 운전자 최모씨와 사고로 숨진 아이 유족이 자동차 제조사인 KG모빌리티(구 쌍용자동차)를 상대로 낸 약 7억6000만원 규모 손해배상 청구 사건 첫 변론기일을 열었다. 사고 발생 약 5개월 만이다.
유족 측 변호사는 이번 사고가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사고 차량은 자율주행 레벨2 차량으로, 해당 자동차에 △전자제어장치(ECU) 소프트웨어 결함 △사고 직전 ‘전방 추돌 경고음’이 울렸으나 자동긴급제동장치(AEB)가 작동하지 않은 결함 △가속 제압 장치(ASS)를 채택하지 않은 결함 등이 있다는 것이다.
이어 “이 사건은 급발진의 전형적인 4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며 결함 의심 정황으로 △‘웽’하는 굉음 △머플러(소음기)에서 흘러나온 액체 △도로상 타이어 자국 △흰 연기를 언급했다.
또 블랙박스 동영상에는 차량의 오작동을 나타내는 운전자의 음성이 녹음돼 있다면서 약 30초간 가속 페달 오조작 가능성에 대해서는 “인체공학적 분석과 경험칙에 반한다”고 일축했다.
재판부는 유족 측이 법원에 신청한 속도 감정(사고기록장치·EDR)과 음향분석 감정을 모두 받아들였다.
유족 측은 사고 5초 전 차량의 속도가 110㎞인 상태에서 분당 회전수(RPM)가 5500까지 올랐으나 ‘속도가 거의 증가하지 않은’ 사실과 ‘가속 페달을 밟았다’는 국과수의 EDR 검사 결과가 모순되는 점을 통해 EDR의 신뢰성 상실을 증명하고자 EDR 감정을 신청했다. 또 정상적인 급가속 시 엔진 소리와 이번 사고에서의 엔진 소리 간 음향 특성이 다른 점 등을 밝히고자 음향분석 감정도 신청했다.
반면 KG모빌리티 측은 차량 결함을 전면 부인하면서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조사 결과가 나온 뒤 상세히 반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다음 변론기일을 정하면서 “이 사건은 소장이 접수된 것이 1월이고 벌써 5월이 됐다. 그 사이(3월에) 기일 통지를 했지만 피고가 신속히 대응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며 “이로 인한 불이익은 피고 측이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 기일은 6월 27일 오후 2시 50분 강릉지원에서 속행할 예정이다. 공정한 판결을 위해 전문 감정인 2명이 출석해 진행한다.
이날 재판에서 도현군의 할머니이자 운전자인 최씨는 진실 규명을 호소했다. 그는 “사랑하는 손자를 잃고 저만 살아남아서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진다. 누가 일부러 사고를 내 손자를 잃겠느냐. 제 과실로 사고를 냈다는 누명을 쓰고는 죄책감에 살아갈 수 없다. 재판장님께서 진실을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고 울먹이며 하소연했다.
숨진 아이 아버지이자 운전자 아들인 이모씨는 “대한민국에서 급발진 사고는 가정파괴범이자 연쇄살인범이다. 러시안룰렛처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급발진 사고의 순번에서 오늘도 무사히 넘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는 현실이 언제까지 계속돼야 하는 건지 마음이 무겁다”며 “부디 이번 사고 원인을 철저히 규명해 달라”고 촉구했다.
한편 지난해 12월 6일 강릉시 홍제동에서 60대 최씨가 몰던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가 배수로로 추락해 동승자였던 12살 손자 도현군이 숨졌다. 최씨는 이 사고로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돼 지난 3월 경찰조사를 받았다.
유족들은 ‘자동차 제조사가 급발진 결함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며 지난 2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을 신청했다. 해당 청원은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국회 소관위원회인 정무위원회로 회부돼 제조물 책임법 개정 논의가 이뤄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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